화를 다스리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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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가의 ‘고딩아빠 잡설’]
  • 정덕재
  • 승인 2013.09.11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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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아빠 잡설 연재를 시작한 이후 우리 집 고딩이 어떤 녀석이냐고 묻는 이들이 간간이 있다. 잡설의 주인공이 고딩 녀석과 친구들이기 때문에 인물의 캐릭터를 아는 것은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하다. 지난해 펴낸 필자의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를 보면 이 녀석의 품행이나 성향을 알 수 있는 시편들이 있다. 시집에 실린 작품 몇 편을 통해 고딩 녀석의 이력을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현우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 작년에는 바람을 들이마시더니 / 얼마 전부터 내뱉는 휘파람을 분다 / 화장실에서 / 방안에서 / 거실에서 / 휘파람 소리가 수시로 떠돈다 / 바람으로 소리를 만드는 법을 / 배우는 아이가 / 바람이 전하는 낭만 / 혹은 폭풍을 이해하고 있을까” - 「현우의 휘파람」 전문. 시도 때도 없이 휘파람을 불며 입으로 소리 만드는 걸 신기해하던 초딩이 사춘기를 겪으며 반항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고민의 출발이며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아가는 일종의 성장통이었다.

“중학교 3학년 아들 녀석이 / 방문을 세게 닫아버리자마자 / 한바탕 소리가 난다 / 분명 의자를 걷어차는 소리일 것이다 / 의자의 고난시대는 중학교 1학년 때 시작되었다 / 의자의 팔걸이가 구부러지고 / 등받이가 휘어지고 / 바퀴가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기도 하고 / 의자의 고난시대는 현재진행형이다 / 한 번은 거실 소파를 걷어차다가 / 발등의 뼈가 금이 가는 바람에 / 목발을 짚은 채 네 개의 다리로 걷기도 했다 / 두 다리의 직립과 / 네 개의 균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 목발은 펜싱선수의 검이 되고 / 저격수의 총이 되고 / 그저 그런 유쾌한 장난감으로 전락했다” - 「의자의 고난시대와 안락」 중에서 일부.

소파 아래 나무로 장식된 부분을 차는 바람에 골절상을 입은 사건은 고딩 녀석 스스로도 어이없어 하는 해프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녀석이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화>라는 시다. “욕을 하거나 / 주먹으로 문을 치다가 / 발을 들었는데 / 찰 것이 마땅치 않다 / 굳건한 철제 책상 / 며칠째 물을 주지 않아 / 목을 길게 빼고 있는 난 / 2초 남짓 들었던 발은 / 잠시나마 분노를 분석한다 / 발이 본 것은 단단하게 서 있는 책상과 / 가냘프게 연명하는 잎새 / 화가 발로 향할 때 / 판단하고 사유하는 발 / 세상의 씨발이 그렇게 태어났다” - 「화」 전문.

나는 시집을 펴내면서 뒤표지에 쓰는 단평을 이 녀석에게 부탁해 몇 줄 실었는데, 녀석이 직접 쓴 글의 일부를 보면 이렇다. “시인이라는 아빠의 시를 별로 본 적이 없다. 시를 잘 쓸 수 있는지, 정말 시인인지 의문을 가졌다. 시 쓰는 것보다 술을 마시는 모습을 더 많이 봤기 때문이다. 내가 아주 마음에 드는 시는 「화」 라는 작품이다. 정말로 화를 발이 분석을 하는 느낌이다. 화가 날 때 물건을 발로 걷어차는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중략) 내가 평소 생각하는 시는 비유와 은유가 가득하고 정갈한 느낌의 시다. 교과서에서 본 시 대부분이 그렇다. 하지만 이 시집은 그렇지 않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솔직한 시다. 그리고 가끔은 더럽게 느껴지는 시도 있다.”

지난해 여름, 녀석은 일주일가량 끙끙거리며 열줄 남짓의 단편을 완성했다. 지금도 나는 이 고딩 녀석에게 일주일에 한 편 정도 글을 써보라고 주문을 한다. 화를 풀기 위해 무언가를 걷어차는 것 보다 글을 쓰면서 마음을 돌아보라는 의미에서다. 글에는 성찰과 사유의 과정이 담겨있다. 철학적 고민이나 논술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기록하는 작업은 삶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의지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수준이다.

요즘 고딩 녀석이 야간자습에 바쁘다는 이유로 글 쓰는 일에 소홀하다. 생활이 틀에 박혀 소재가 없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일주일에 한 번은 고사하고 한 달에 한 편 남짓 밖에 쓰지 않는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일기 쓰는 것도 미루고 있는 가운데, 어느 날 기발한 생각이 났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아빠! 시간도 없는데 시 써 볼까”

시를 길이로 이해하는 단순한 녀석 같으니, 아마도 제목을 ‘뱀’이라고 쓰고 딱 한 줄 쓸 녀석이다. ‘길다, 길어서 길을 만들어 가는구나’라고. 그리고 사족같은 말로 나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아빠도 화나는 일 있다고 술 마시지 말고 시를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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