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내일 날씨 춥대?”
“올 가을 들어 제일 춥다고 하던데. 내복 입고 가”
“아! 무슨 내복이야, 깔 안나게”
“깔이 뭐냐? 각이면 몰라도”
“그래도 내복은 아니지”
물론 내복을 입을 날씨는 아니지만 농담 삼아 던진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한옥마을은 전주의 대표적인 명소 중 하나다. 고풍스러운 한옥의 정감을 느끼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그날 밤 전주 나들이의 소감을 물어보았다.
“맛있는 거 많이 먹었니?”
“떡갈비는 맛있었는데 팥빙수는 별로였어”
팥빙수를 먹기에 어울리지 않는 계절이지만 한옥마을에는 옛날팥빙수로 유명한 집이 있다. 프랜차이즈 제과점 빙수와는 다르다. 장식이 요란하지 않고 콩가루가 들어있다. 어른들은 좋아할만 하지만 고딩들 입맛에는 맞지 않은 것 같았다.
“거기서 본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냐?”
“골목이 가장 좋던데”
의외의 대답이었다. 골목이 고딩들에게 색다른 구경거리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골목이 사라진 것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부터다. 골목길이 자취를 감추면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끊겼다. 예전에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비석치기를 하고 고무줄놀이를 하던 모습은 늘 벌어지는 일상이었다. 그리고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는 오가는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사랑방이었고, 밤늦게 귀가하는 취객들은 담벼락에 시원하게 오줌을 쌀 수 있는 배설의 자리였다. 또한 젊은 연인들이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는 공간이기도 했다.
태평동 어느 골목 담장에 쓰여있던 “진학이는 승숙이를 좋아해”라는 분필 글씨가 지금도 아련하다. 그런 글씨는 대개가 제 3자가 쓴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쓴 것일 확률이 높다. 다른 골목 담장에도 이런 유형의 문구들은 많이 쓰여 있었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나타나기 시작한 또래 아이들의 유쾌한 스캔들이었다. 골목 풍경을 담은 필자의 졸시를 옮겨본다.
“밤늦게 개가 짖는 것은/담을 넘는 도둑 때문이 아니라/가끔씩/담 옆의 두런거림이/포옹으로 바뀌는/격정의 풍경 때문임을, /어둠을 가르는 칼날의 도마질같은/여자의 구두소리가/말줄임표로 찍히는 자정 이후/오래된 골목은 알고 있을 것이다/밤늦게 개가 짖는 이유를. <시 ‘개가 있는 골목’ 전문>
골목은 여기저기로 이어지는 통로이자 이웃과 교감을 나누는 열린 공간이다. 그곳에는 마을의 역사가 담겨있고 이웃의 서글픈 사연들이 스며있다. 골목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담장 너머 이웃을 바라보던 시선도 거두어졌다. 공동체적 성격의 마을문화가 사라진 것도 골목이 사라진 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
“본 것들이 많을텐데 골목이 왜 기억에 남니?”
나는 골목에 대한 녀석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냥 여기 저기 얽혀 있는 게 재미있었어”
얽혀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중심의 주거환경은 관계의 개별화를 가져왔고 이웃에 대한 시선을 부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요즘의 고딩들에게 한옥마을의 좁은 골목이 재미있게 다가온 것은 주목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근데 아빠!, 내가 선물 사 올려고 했는데 나이가 어려서…”
“나이랑 선물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거기 슈퍼에서 이강주를 팔더라구. 아빠가 좋아하는 술”
어디서 배운 립 서비스인지, 술 생각이 벼락처럼 찾아왔다. 골목 안 담벼락 아래서 구토를 하던 젊은 시절의 방황이 떠올랐다. 등을 두드려주던 친구의 손길이 그리운 가을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