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작가의 고딩아빠 잡설] 기차여행을 준비하며
[정 작가의 고딩아빠 잡설] 기차여행을 준비하며
  • 정덕재
  • 승인 2014.07.23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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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시인·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 책임작가]다음 주부터 우리 집 고딩의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방학을 하더라도 보충수업에 야간자습까지 이어져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정명훈의 유행어처럼 ‘의미 없는’ 일이긴 하다. 그래도 일주일 남짓 온전한 방학이 있어 기대가 만만치 않다.

녀석은 짧은 방학을 어떻게 보낼까 고심한 끝에 중학교 동창 여섯 명과 기차여행을 가기로 했다. 5일 동안 기차를 타고 충청도·강원도·전라도·경상도를 돌아다니는 여정이다. 학생 대상 철도상품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레일패스를 사면 해당기간 동안 새마을호와 무궁화호를 맘껏 탈 수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할인이 되기 때문에 5일 동안 철도요금이 5만 원 가량 든다고 한다.

지난 주말 기차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녀석과 친구들은 구체적인 계획수립에 들어갔다. 아직 코스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많은 곳을 돌아다니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온 곳은 풍기역 단양역 대천역 부산역 등이다. 문제는 숙소다. 사흘은 레일패스를 통해 해결된다고 해도 나머지 이틀은 숙박을 알아봐야 된다고 했다. 그래서 하루는 밤기차를 타고 눈을 붙이고, 나머지 하루는 해수욕장에서 노숙할 생각이라고 했다.

고딩 놈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젊은 시절 다녔던 기차여행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둘기호가 사라지기 전까지 기차는 낭만 그 자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위험한 일이었지만 달리는 기차의 난간을 잡고 고개를 내밀던 시절도 있었다. 기차 안에서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마시며 기타를 치던 MT가는 길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술 취한 선배를 배웅하던 대전역 광장에서 또 다시 소주잔을 기울이며 아침 해를 보던 생각도 떠오른다.

나는 요즘도 한 달에 몇 차례 기차를 타곤 한다. 술을 마시면 서대전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귀가하기 때문에 기차는 여전히 친근하다.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동안 선남선녀들이 아쉬움을 간직하고 배웅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기차를 탄 뒤 간혹 술이 부족하다 싶으면 캔 맥주를 마시며 차창 밖 밤풍경을 음미한다. 

지금은 수많은 간이역들이 자본의 논리 앞에서 문을 닫은 채 세월의 이끼를 만들어 내고 있다. 문 닫은 일부 역에서 문화공간을 만들어 추억을 되새김질 하지만 낭만의 자리에는 이미 KTX의 속도가 차지하고 있다.

고딩 놈이 기차여행 계획을 세우는 동안 나는 참고할 만한 자료를 챙겨 주기로 했다. 자료의 성격을 살짝 알려 주었더니 녀석의 인상이 구겨졌다. 읽고 봐야 할 자료니 그럴 법도 했지만 친구와 함께 하는 기차여행에 의미를 부여해보라고 말했다.

녀석들의 여행 가방에 넣어줄 자료나 떠나기 전에 봐야할 것들은 대략 이렇다. 한 권의 책, 한 장의 열차 티켓으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기차역에서 백화를 떠나보내는 황석영의 소설 ‘삼포가는 길’ 그리고 철도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로 알려진 최남선의 ‘경부철도가’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바람 부는 강변역에서/나는 오늘도/우리가 물결처럼/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로 마무리 하는 정호승의 시 ‘강변역에서’ 옛 대전 시민회관 앞에 서 있던 시비에 적힌 한성기의 ‘역’이란 시도 챙겨주려고 한다.

“아득한 선로 위에/없는 듯 있는 듯/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이 구절을 읽고 있으면 인생이라는 길과 존재의 외로움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우리의 현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철도 민영화가 가져올 문제점을 마지막 토론 자료로 준비해 주기로 했다.

“아빠, 이런 자료 가지고 가면 친구들한테 몰매 맞을텐데”
“그래도 짧은 것들이니까 한 번씩 읽어보면 좋잖아”

“문학작품들은 그런대로 해볼 수 있지만 철도민영화는 여행 주제로 너무 무겁지 않아?”
“이놈아 나는 고딩 1학년 때 판암동 포도밭에서 이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읽었다구“

“아빠, 옛날 얘기하면 늙은 거라고 했지”

기차를 타기까지 아직 여유가 있기 때문에 더 생각해보자며 녀석과 타협을 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인과 기차를 타고 만주로 떠나고 싶었던 시인 백석의 삶은 어떨까. 철도 문물과 관련 있는 ‘식민지근대화 논쟁’ 자료를 찾아볼까. 강제로 시베리아 열차를 탔던 고려인의 애잔한 삶을 들여다볼까.

요즘 나는 기차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서 현대사의 굴곡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있다. 고딩 놈은 기차여행에 들떠 있지만 자료를 준비하는 나의 마음은 자꾸만 무거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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