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딩아빠 잡설] 졸업 30년의 추억
[고딩아빠 잡설] 졸업 30년의 추억
  • 정덕재
  • 승인 2014.09.09 17: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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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고등학교 졸업 30년을 알리는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집중적으로 오기 시작한 것은 8월 하순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보고 싶다 친구야, 얼굴 좀 한 번 보자 등등 일반적인 문구였지만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을 피하는 경향이 있어 공식 동창모임은 10년 전인 20주년 동창회가 마지막이었다. 어느새 오십 줄에 접어든 친구들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8월 마지막 주 토요일 저녁, 동창회가 열리는 연회장을 찾았다. 준비위원회에서 미리 명찰을 마련한 덕분에 얼굴과 이름을 비교하며 낯선 친구들과도 쉽게 수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동창회를 준비한 녀석들이 행사를 꼼꼼하게 꾸몄다는 것은 군데군데 확인할 수 있었다. 명찰에는 고등학교 졸업앨범에 있는 사진을 복사해 붙여놓아 잠시나마 추억의 얼굴을 돌아보기에 충분했다. 어슬렁거리며 행사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30년 만에 처음 본 녀석들도 여럿 있었고 10여 년 만에 본 친구들도 있었다. 자리는 3학년 때 반을 기준으로 배치를 해놓았다.

“야, 우리가 같은 반 이었구나”
“그러게, 나는 1학년 때 같은 반인 줄 알았는데”
“너는 머리 많이 빠졌네”
“그러는 너는 배가 많이 나왔네”

지극히 일상적인 수준의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처음 본 동창들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보문산 자락에 있다. 졸업 당시는 12개 반이나 되었기 때문에 졸업생만도 700명이 넘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을 모르는 동창들도 적잖지만 친구의 친구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안부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예전과 다르게 투병중이거나 세상을 뜬 녀석들의 소식도 심심찮게 들어야 했다. 승진을 하더니 갑자기 몸이 아프다는 녀석도 있었고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친구들의 소식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10년 전 동창회와 비교해봤을 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명함을 주고받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10년 전 마흔 살 동창회에서는 아예 명함을 뿌리는 친구들을 적잖게 보았지만 이번에는 명함 한 장 보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세월의 흐름 탓이 아닐까 싶었다. 대개의 조직에 속해있는 40대들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반면, 오십 줄에 접어들면서 포기를 하거나 삶의 지혜를 깨우치며 옆과 뒤를 돌아보게 되지 않았나 싶다. 녀석들은 번듯한 직위가 찍혀있는 명함이 얼마나 수명을 다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허튼 명예도 되지 못하는 쓸쓸한 존재의 그림자도 눈치 채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문예부 활동을 하던 친구들이 생각났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참석을 하지 못한 녀석들이 많았다. 쥐포 두 세장 사다놓고 골방에서 소주를 마시며 문학을 토로하던 시기에 우리는 위대한 작가의 꿈을 꾸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은 이름 석자가 그림이 될 것이라며 격정적으로 붓을 놀렸고, 탈춤을 추던 녀석들은 사회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심한 세월 앞에 그 기세는 대부분 꺾인 모습이었다.

친구들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어떤 녀석이 옆에 있던 여학교에서는 30주년 행사를 했냐며 말을 꺼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많은 놈들이 추억의 여고생들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던 단발머리 여고생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원고지를 옆에 끼고 치맛자락을 날리며 날렵하게 걷던 소녀는 얼마나 늙었을까. 잠시 상념에 젖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자리는 하나 둘 비어갔다. 예약한 기차 시간 때문에 간다는 인사를 던지며 녀석들은 떠나갔다. 나도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며 자리를 빠져 나왔다. 불과 두 시간 남짓 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계를 과거로 돌리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우리말이야, 추하게는 늙지 말자”

한 친구가 내뱉고 간 말이 오랫동안 머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어디 쉬운 일인가. 의식이 퇴보하고 지식의 축적은 더뎌지고 감성의 틈은 막혀버리면서 메마른 늙은이가 되는게 대부분이다. 그래도, 힘겨워도, 버틸 때까지는 버텨 불을 피워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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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2014-09-15 09:32:33
정말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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