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섭의 그림읽기] 떠돌이 장사치의 고단한 ‘쉼표’
[변상섭의 그림읽기] 떠돌이 장사치의 고단한 ‘쉼표’
권용정 作 ‘등짐장수’
  •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 승인 2018.09.15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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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정 ‘등짐장수’ (19세기, 간송미술관)
권용정 ‘등짐장수’ (19세기, 간송미술관)

[굿모닝충청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늙수그레한 등짐장수가 지게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돌린다.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표정에서 피곤 끼가 잔뜩 묻어난다. 사람이 지게에 기댄 건지 지게가 사람한테 기댄 건지 분간이 안 된다. 힘에 부친 탓이다.

200여 년 전 한 등짐장수의 모습에서 하루하루 허덕대며 오늘을 사는 동시대 군상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작품은 권용정(1801-?)의 ‘등짐장수(19세기)’다. 쭈그러진 패랭이에 꽂힌 담뱃대, 구부정한 등, 볼품없이 말라붙은 수염 등 힘 좋고 세월 좋던 젊은 시절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다. 세월의 덧없음과 늚음의 비애가 동시에 느껴진다.

몰골이 이 모양이니 평생 드나들던 객줏집은 물론이고 주막집 주모도 본숭만숭할 처지다. 젊은 시절의 영화는 한낱 신기루다. 오늘따라 지게에 동여맨 오지그릇, 질그릇 자배기가 유난히 버거워 보인다. 세월의 무게까지 얹어진 탓일 게다. 젊음의 호시절을 저만큼 떠나보내고 지게 목발에 의지하는 신세가 따분하고 서러워 도무지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

그림 속 등짐장수 행장이 딱 그렇다는 얘기다.   짚신이 벗어질까 봐 염려돼 끈을 단단히 묶었다. 펄렁이는 바짓가랑이는 거추장스러워 행전으로 동여맸다. 먼 길을 지나왔고 한숨 돌리면 또 더 먼 길을 가야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무지렁이 삶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담뱃대에 연초를 쟁여 한 대 피우는 게 짧은 휴식의 마무리다.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직무대리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직무대리

 

고단한 등짐장수는 19세기 보부상 모두를 대신하는 자화상이다. 권용정은 늙은 등짐장수를 통해 보부상의 삶과 일대기, 더 나아가 그 시대 떠돌이 장사치의 고단한 삶을 표현한 것이다. 오라는 데는 없어도 무거운 짐을 지고 이 마을 저 마을 부산하게 옮겨 다녀야 궁핍하고 알량한 살림이나마 유지할 수 있다. 그런 떠돌이 등짐장수의 고달픈 유랑생활을 보태고 빼고 할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수수한 필치로 묘사했다. 간결한 옷 주름이 돋보인다. 마치 단원·혜원 근간의 풍속화가 연상된다. 배경 없이 인물 중심의 구도 또한 그렇다. 권용정에 대한 기록은 아주 빈약하다.

출생연도와 부사 벼슬을 했고, 산수를 잘 그렸다는 게 전부다. 유작도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등짐장수가 유일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옛말이 조금도 헛됨이 없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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