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4군 명칭을 최초로 기록한 ‘한서’, 신빙성 있는가
[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4군 명칭을 최초로 기록한 ‘한서’, 신빙성 있는가
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는 조한전쟁의 비밀 ④
  • 김탁
  • 승인 2018.09.23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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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의 <한서> 무제본기에 처음 등장하는 한사군의 명칭
앞에서 누누히 강조했다시피 조선4군, 소위 한사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사기> 조선열전이다.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이로써 조선을 평정하고 4군으로 했다. 삼을 봉해 홰청후, 한음은 적저후, 왕겹은 평주후, 우거의 아들 장은 기후로 삼았다. 최는 아비(로인)가 죽었으나 큰 공이 있으므로 온양후로 삼았다.(以故遂定朝鮮爲四郡 封參爲澅淸候 陰爲荻苴候 唊爲平州候 長降爲幾候 最以父死頗有功爲溫陽候)”라고 기록했다. 여기에서는 4군이라고만 했을 뿐 4군의 명칭은 기록하지 못했다.

대신에 우거정권을 타도한 공이 있는 토착조선인 세력의 지도자에게 각기 작위를 부여하고 자치적으로 다스리게 했다. 작위는 중원 정권이 주변 민족을 회유하기 위해서 책봉하는 일종의 외교적인 조치이다. 해당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대신에 한족 황제에게 외신外臣으로서 복종할것을 요구하는 외교관례라고 할수 있다. 조한전쟁에 종군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긴 사마천이 4군의 명칭을 누락시켰다고 보기는 어렵고 따라서 한무제 당시에 4군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토착 조선인 세력들이 자치적으로 다스렸음이 명확하다.

소위 한사군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사마천 이후에 180년만에 나온 반고(班固, 건무 8년(AD 32년) ~ 영원 4년(AD 92년))의 <한서(漢書)》 <무제(武帝) 본기>로서 다음과 같이 다르게 기록했다.

“마침내 조선을 멸해 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했다(遂滅朝鮮爲樂浪玄  臨屯眞番)”

즉 <사기>에서 조선을 평정(定)했다는 표현을 조선을 멸망(滅)시킨 것으로 바뀌고 처음으로 소위 한사군의 명칭이 등장시켰다. 정(定)은 난을 수습했다는 뜻으로 한무제가 이기지 못한 전쟁을 사마천은 양심상 멸(滅)이라고 하지 못했다. 반고는 철저한 존화주의자로서 서슴없이 조선을 멸(滅)한 것으로 기록했다.

전쟁을 직접 목격한 사마천 조차 명칭을 적시하지 못했던 4군의 이름을 180년후에(두 인물의 사망년도 기준) 반고가 어떻게 알고 무제본기에 기록할 수 있었을까?

사마천의 <사기>에서 부터 반고의 <한서>까지 180년간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는가?

여기서 문제는 작위를 받은 조선5후의 지배세력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반고의 <한서>에 기록된 4군으로 날조가 된 것인지 규명해야 할 것이다. 한사군을 철석같이 믿고 더구나 한반도 내에 설치됬다고 하는 강단학노들도 그렇지만 한사군 재 대륙설을 주장하는 민족사학계 역시 <사기>에 기록된 조선5후가 180년 이후 <한서>에서 4군으로 변화된 과정을 규명해서 소위 한사군의 미스테리를 풀어 줄 책임이 있다.

이야기를 한무제 당시로 돌려보자.

위만조선이 내부반란으로 무너지고 난 다음에 한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은 부여로 나라이름을 바꾼 북부여 세력이었다.

북부여 고두막한은 위만조선이 멸망하던 BC 108년부터 한나라에 대항하는 의병을 일으켜서 저항하다가 BC 60년에 사망했다. 조한전쟁(한사군전쟁)을 일어킨 주역인 한무제 역시 무려 44년에 걸친 전쟁군주로서 역할을 마감하고 BC 87년에 사망했다. 그는 BC 133년에 1차 흉노 토벌전을 개시한 이래 BC 90년까지 무려 44년간 쉬임없이 전쟁을 이어가서 한나라 경제가 파탄나고 인구조차 감소하게 되었다. BC 89년에 소위 윤대輪臺의 조서를 내리고 전쟁포기를 선언하고 69세를 일기로 이듬해 죽어갔다. 사마천 역시 정확한 사망연도는 불분명하나 한무제가 사망하던 전후해인 BC 86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고있다.

한무제는 위만조선 멸망 직후에 고두막한의 지속적인 저항에 직면했고 이어서 10차 흉노 토벌전(BC 99), 11차 토벌전(BC 97), 12차 토벌전(BC 90)을 수행하느라고 위만조선을 직접경영할 수 있는 군사적인 여력이 부족했다. 더구나 10차 대 흉노전에서는 장군 이릉이 투항했고, 24만을 동원한 12차 마지막 원정에서는 장군 이광리가 투항함으로서 이듬해인 BC 89년에는 전쟁포기까지 선언했다. 위만조선이 망한지 19년만에 전쟁포기를 선언하고 2년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아 이 21년동안에 토착 조선5후가 다스리던 위만조선을 장악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북부여를 재건한 의병장 고두막한이 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마당에 한나라 관리가 파견되서 한사군을 설치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고두막한은 무제보다 27년을 더 생존하면서 저항군을 지휘했고 고두막한을 이은 고무서의 사위로서 추모왕(주몽)이 등장하여 고구려가 대한나라 항전을 이어갔다.

조선5후의 지배시기는 BC 108년에서 시작해서 이들이 자연사하는 BC 101까지이다. 이후에는 기록이 없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수 없다. 최소한 사마천이 사망하는 시기로 추정하는 BC 86년까자도 한사군이 설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에 설치가 되었다면 사망하기 전에 구체적인 명칭과 위치를 기록으로 남겨놓았을 것이다. 다만 조선5후가 사망한 이후에는 한나라에서 이 지역을 한나라의 군현으로 복속시킬려고 시도했을 것이란 추정을 해 볼 수 있겠으니 북부여의 저항군과 토착 조선인 세력을 제어하고 한나라에서 관리를 파견하고 직접 지배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 기록이라면 정사正史라고 하여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반고의 <한서> 4군 기록은 신빙성이 있는 것인가 ?

먼저 반고라는 인물은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지 살펴 보도록 하자. 반고가 출생한 시대적인 배경을 짚어 보면 그의 역사관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전한이 AD 8년에 왕망에 의해서 멸망하고 AD 25년에 광무제 유수가 후한을 건국했다. 반고는 후한을 건국하고 7년만에 태어났다. 더구나 그의 부친인 반표班彪는 뛰어난 역사학자로서 <사기후전後傳>65편을 저술하고 사마천이 “역사적인 사실만 싣기에 급급하여 논의가 천박하고 황노의 학술을 숭상하고 유가를 배척했다"고 비판한 인물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반고는 한나라의 위대한 역사를 후세에 선양하기 위해서 한나라 건국자인 유방부터 전한 평제까지 제왕의 치적을 중심으로 12세 230년간의 단대사를 <한서漢書>라고 이름하여 펴냈다. 그 역시 무제 이후에 국교화된 존화양이尊華攘夷라는 유교적인 가치관에 따른 역사관을 견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수정조선遂定朝鮮”을 “수멸조선遂滅朝鮮”으로 고치고 무제의 치적을 높히기 위하여 4군의 이름을 명시했다고 보여진다.

“같은《한서》에도 ‘2군’, ‘3군’, ‘4군’으로 제각기 기록이 다르게 나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을 해야 할 것인가 ?

《한서》<지리지>에는 “현도·낙랑은 무제 때 설치했다”고 2군으로 적고 있으며, <오행지(五行志)>는 “두 장군이 조선을 정벌하고 삼군을 열었다”고 3군으로 적었고, <무제본기>는 4군으로 적었습니다. 같은 《한서》인데 <지리지>에는 2군, <오행지>에는 3군, <무제 본기>에는 4군으로 제각기 기술하고 있는 것이죠.

이는 행정기구가 2군(낙랑·현도) ⇒ 3군(낙랑·임둔·현도) ⇒ 4군(낙랑·임둔·진번·현도) ⇒ 2군(낙랑·현도) ⇒ 1군(낙랑)으로 여러차례 조정되었음을 말합니다.

초기에 낙랑군은 난하 유역에서 대릉하 유역의 왕검성[북진 일대]까지 가장 넓은 영역이었습니다. 그리고 현도군은 의무려산 북방의 부신(阜新) 서부지역에서 대릉하 상류 유역 사이에 있었습니다. 이곳이 ‘서안평(西安平)’입니다. 서안평은 동이족과 漢족 간에 이 요충지를 확보하기위하여 수없이 전투를 벌인 격전지입니다. <*현행 통설은 서안평을 압록강 북쪽 ‘단동(丹東)’ 일대라고하나, 착오이므로 시정되어야 함.>

우리가 알고 있는 한사군의 낙랑·임둔·진번·현도라는 이름은 漢 무제 때 처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들 이름은 단군조선의 제후국[거수국(渠帥國)] 중에 있었던 동이족의 종족 이름이며, 또한 이들 종족이 살았던 부락이름이기도 합니다. 다만, 漢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한 후,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이들 부락을 漢나라의 郡이라는 행정기구로 바꾸고, 행정관을 漢족으로 임명한 것이죠. 처음엔 관리들만이 漢족이었지만 점차 부락민 중에서 漢족 비율이 늘어나면서 동이족은 동쪽으로 이주해 갑니다."<참조: 이덕일,《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역사의 아침>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같이 사마천은 구체적인 명칭없이 4군만 언급했고 반고는 2군, 3군, 4군등 횡설수설하고 있다. 이처럼 실체도 불분명한 4군을 마치 한무제가 설치한 것처럼 기정사실로 못박아 놓고 교과서에까지 자랑스럽게 가르친 것은 다름아닌 일제의 식민사학과 이를 계승한 현 강단사학 학노들이다.

결국 한사군이라는 명칭은 토착세력인 조선 5후가 사망하고 지배권의 공백상태가 발생함으로 한나라와 북부여, 고구려가 지배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불려진 우리 고유의 지명을 한사군이라고 명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나라는 북부여와 치열한 공방전을 통해서 확보된 지역을 군으로 호칭했고 이 마져도 2군, 3군, 혹은 4군을 서로 통합하고 폐쇄하는 과정에서 낙랑군 하나만 겨우 보존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과정을 무시하고 애초부터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4군을 설치한 것처럼 가르치는 현행 역사교육은 시급히 시정이 되어야 한다.

김탁우리역사바로알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한국상고사·민족사상 연구가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정책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Simple People Inc 대표
김탁 우리역사바로알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한국상고사·민족사상 연구가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정책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Simple People Inc 대표

 

더구나 4군의 위치를 평안도 황해도와 같은 한반도 내로 비정하고 낙랑군이 400년이나 한반도 내에서 존속했다고 가르치는 한국사야 말로 스스로 중국의 속국임을 자인하는 꼴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자학역사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

한국사학계는 좀더 치밀하게 한.중 문헌을 분석해서 날조된 한사군설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할 것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4군 명칭의 유래와 낙랑군 재한반도설의 허구를 파헤치고 한사군 관련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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