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탁월한 정치사상으로 소론(小論)을 이끌다
[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탁월한 정치사상으로 소론(小論)을 이끌다
(19) 대전의 인물-윤증(尹拯)
  • 자료협조=대전평생교육진흥원
  • 승인 2018.10.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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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생몰연대 : 1629년(인조7)∼1714년(숙종40)
ㆍ묘 소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

생애
윤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자인(子仁)·인경(仁卿),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이다. 성혼(成渾)의 외손자이다. 아버지는 미촌(美村) 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생원 장백(長白)의 딸]로 그 사이에서 4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특히 병자호란 강화도 침공 때에는 앞장서 자결하여 정절을 지킨 열부였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윤증의 고조인 윤돈이 처가가 있는 충청남도 노성에 처음 정착한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그가 9살이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가족들과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윤증은 전쟁 중 두 여종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고 자결한 어머니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약속했던 순절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 윤선거를 찾기 위해 성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하는 평탄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일은 훗날 ‘강도사’로 비화되었고,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 사이에서 벌어지는 ‘회니시비(懷泥是非)’의 논쟁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는 평생의 스승 아버지 윤선거를 비롯해 시남(市南) 유계(兪棨)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권시(權諰), 송준길(宋浚吉), 그리고 송시열에게서도 수학하였다.

1647년(인조25) 19세에 탄옹炭翁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예(禮)를 익혔고 이후 김집(金集)에게서 주자(朱子)에 관해 배웠다. 1652년(효종3) 송준길을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고, 1657년(효종8) 29세에는 때 김집의 권유로 회천(懷川 : 지금의 회덕)에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30세에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선비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발탁된 이후 86세에 별세할 때까지 그에게 공조좌랑·사헌부 지평·세자시강원 진선·사헌부 장령·집의·호조참의·대사헌·찬선·이조참판·우참찬·이조판서·좌참찬·좌찬성·우의정 등 여러 관직이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양하고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윤증은 36세에 학행으로 내시교관에 제수된 것을 기점으로 81세에 우의정에 제수될 때까지 경연관·호조참의·이조참의·한성우윤(한성부의 종2품 벼슬)·대사헌·이조참판·공조판서·의정부 우참찬, 좌찬성 등 각종 현직에 대한 임명장이 내렸을 만큼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번번이 사양하고 학문과 후학양성에만 전념하였다. 따라서 숙종 또한 윤증의 모습이 어떠한지 자못 궁금해 했다고 한다.

임금이 대관절 얼굴도 모르고 재상을 임명한 것은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도 없는 일이다. 이런 일화를 통해 당시 사회에서 윤증의 비중이 어떠했는가를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에게는 ‘백의정승’이라는 애칭이 또 하나 붙게 되는데, 이것은 물론 관복 입고 행공해 본 일이 없는 선비 차림의 정승이라는 말이다.

윤증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은 45세(1673년, 현종14) 때 회니시비(懷尼是非)이다. 윤증의 저서로는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 등이 있다.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그의 종택(충남 논산시 노성면 소재. 중요민속자료 제190호)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윤증의 초상화(충남역사문화연구원)
윤증의 초상화(충남역사문화연구원)

 

사상
노론과 소론의 분당은 송시열과의 대립에 의해 발생되었다. 그 대립은 양자의 정치적·철학적 입장의 차이 및 송시열이 지은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에 대한 불만에 의해 야기된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송시열은 숭명의리(崇明義理)를 내세워 북벌론을 주장했고, 윤증은 명을 물리친 새로운 왕조인 청(淸)에 대해 실리적인 외교를 해야 함을 주장했다. 윤증은 호란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졌다.
윤증은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특히 정제두(鄭齊斗)와 각별한 인연을 가졌다.

두 사람 사이의 학문 사상적 교류는 양자의 문집에 실린 서신에서 실증되고 있다.

양자가 공유했던 점은 송시열이 내세우는 주자학적 의리론만으로는 변모하는 국제정세에서 능동적으로 응하기 어렵다는 생각 및 양명학적 관심과 실학적 경륜을 담은 정치철학 등이었다.

그는 율곡 이이로부터 송시열에게 전래된 주자학을 배웠지만, 그러나 그는주자학을 맹종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의 학설에는 양명학적 성향이 스며있었다. 또한 그는 아버지를 통하여 성혼의 은거자수(隱居自守)와 실천궁행(實踐躬行) 사상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명분이나 형식보다는 실(實)을 중시하는 무실(務實)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자료협조=대전평생교육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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