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의 눈] 덕산 가야사지 발굴로 생생한 역사 되새겨야
[시민기자의 눈] 덕산 가야사지 발굴로 생생한 역사 되새겨야
  • 이기웅 시민기자
  • 승인 2018.10.31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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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이기웅 시민기자] 금당지로 추정하는 사역이 지난 19일부터 예산군청과 동방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된다.

내포 최고의 절이었다는 가야사. 누구는 ‘백제시대 가람’이라 하고 누구는 ‘고려시대 가람’이라 한다.

가야사는 백제 혹은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돼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내포지역의 중심 사찰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소 1753년 이전까지는 위태롭게 운영되던 절이라는 것을 당시 가야산을 여행한 시인 묵객들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한 때 가야산은 가야사와 보원사를 중심으로 내포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기록도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잊혀졌다.

류숙과 손청, 임방, 이의숙, 윤봉구, 이가환, 이삼환, 이철환, 정약용, 김윤식 등 수 많은 시인묵객들이 가야산을 찾은 것으로 보이지만 가야산과 가야사에 관한 기록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다.

여기에 가야사의 창건은 정확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사역에선 백제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의 와편이 다수 수습되고 예산군지에 백제 승려 겸익이 526년(성왕 4) 인도로 건너가서 중부의 상가나사에서 율부를 공부한 뒤, 530년 귀국해 창건했다고 기록을 남기지만 근거를 더 찾아야하는 상황이다.

또 다른 기록인 ‘천태역대조사전기편’에는 고려시대 대선사 교웅 (1076~1142) 스님이 1108년부터 홍주(洪州)의 백암사(白嵒寺)에 7년 간 주석하며 정진하는데 하루는 가야사의 창고에서 중요한 불경을 찾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가야사(伽倻寺)에 갔는데〈유가사지론〉 100권이 옛 창고에 방치돼 있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면서 책을 모두 짊어지고 백암사로 돌아와 정독한 일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1177년(명종 7)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났을 때 가야사를 점거한 기록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류숙(柳淑, 1316~1368)이 ‘가야사(가야사) 주지(주지) 노스님의 시를 차운하여 삼수 (차가야사주로시次伽倻寺住老詩三首)’라는 글을 남긴다.

조선 중기에는 임방(任埅, 1640~1724)이 1674년 가야산을 찾아 ‘가야사의 오층 석탑과 귀부의 큰 석비 일부 쓰러져 가는 전각이 남아 있다’는 등 당시 가야사의 규모와 사세와 운영되는 시기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글을 남긴다.

가야사의 폐사를 암시하는 글은 17세기 선비들에 의해 남겨진다.

임방과 이의숙, 김진규 내포의 선비 이철환이 1753년부터 2년 간 가야산을 여행하며 가야사  페사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남긴 기록 남긴다.

이철환이 남긴 상산삼매에 가야사의 금당과 오층 석탑을 알 수 있는 내용 중 일부이다.

상산삼매에는 ‘1753년 12월 12일 묘암사를 다녀오고 금탑을 감상하다’라는 제하에 ‘가야사는 폐사하고 그 주변에 있던 가야사를 모칭하는 묘암사는 혹은 무암사라고 돼 있다’고 돼 있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단 그 절은 가야사에 속하였다.

가야사가 불탄 뒤로부터 그 본래 쓰던 이름은 버리고(그 옆에 있던 절들이) 통틀어 가야사라고 모칭했다.

그 절은 불전이 동쪽으로 향하였고 불상은 남쪽으로 향하고 있고 정문 앞에는 누를 지었는데 규모는 매우 웅장하고 번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다 무너졌으니 다시 논할 것이 없다.

불탑 뒤에는 돌로 된 광명대가 있고 그 뒤로 금당이 있는데 그 금당의 유허와 탑이 광명대와 더불어 모두 이 암자에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 유지가 모든 산중의 최고 절경이었던 것이다’라는 기록을 통해 이철환 선생은 가야사의 금당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글을 남긴다.

이의숙(李義肅, ?∼1807)도 가야산기<伽倻山記>를 통해 가야사의 모습을 적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절 뒤에 돌계단 73개를 개를 만들고 위에 석탑을 세웠는데, 높이는 가히 300척은 됨직하여 층마다 각각 작은 불신이 있고 금탑과 두 길이 넘는 거대한 불우가 있었다’

이와 같이 17~18세기 가야산을 여행했던 임방과 이철환, 이의숙의 글을 통해 가야사가 폐사한 모습과 금당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이번에 발굴하는 곳이 바로 가야사의 금당 그곳이다.

시인 묵객들의 글 속에서만 남겨진 가야사의 모든 흔적은 험하게 사라지고 오직 발굴을 통해 답이 있을 듯하다.

1674년 임방과 이의숙, 1754년 이철환 등이 보았다는 가야사의 금탑(金塔)과 그 뒤에 있었던 금당(金堂)이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문헌으로만 전해지는 거대한 주상과 티벳의 독톡한 5층 석탑 등 땅속에 숨어버린 유적의 민낯을 찾는 발굴을 통해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다.

땅 위에서 역사는 흘러가고 땅 밑에는 생생한 가야산의 역사가 잠겨있다.

남연군의 묘가 조성되며 탑 자리를 비롯한 사역은 훼손되었지만 당시의 토목 기술로 볼 때 다행히 땅 속 깊은 곳에 숨겨진 1500년의 흔적은 여전히 가야사지 사역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게 분명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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