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인문학 서재] 신하들의 눈이 비친 정조, 어떤 모습일까
[임영호의 인문학 서재] 신하들의 눈이 비친 정조, 어떤 모습일까
(30) 정조 ‘일득록’
  •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 승인 2018.11.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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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조선 최고의 개혁군주는 누구일까? 세종(世宗)?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조(正祖,1752~1800)입니다. 세종은 서슬 퍼런 건국 초기 군주이나 정조는 조선의 22대 왕입니다. 조선이 건국한지 400년이나 되었습니다. 두 차례의 큰 전쟁과 사색당쟁이 민심을 피폐시켰고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어이없이 희생당하는 음흉한 시기로 소위 적폐가 산더미처럼 쌓여 민심이 분출되기 직전이었습니다. 다행이라면 할아버지 영조(英祖)가 임금다운 임금이라 그와 같은 민심 흐름을 연기시키거나 누르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정조는 군주이고, 학자이며, 만백성의 스승이었습니다.

정조의 이름은 이산(李祘)이나 한자로 써보면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합니다. 선으로 읽어야 할지 성으로 읽어야 할지 모릅니다. 요즘은 이산으로 읽습니다. 호는 여러 개 있습니다. 그중 정조 말년에 지은 만월명월주인옹(滿月明月主人翁)이라는  호가 정조 자신의 의지와 철학에 일치하는 호입니다. 만개의 천에 비친 밝은 달의 주인 늙은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정치가 널리 만백성에게 고루 미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습니다.

‘일득록(日得錄)’은 신하들의 눈에 비친 정조의 언행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관의 기록과는 다릅니다. 규장각 신하들이 평소 보고 들었던 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연말에 기록을 모으고 편집하여 규장각에 보관하게 한 것입니다. 규장각 신하는 사관처럼 사실대로 적기를 지시하였습니다. 자기가 미쳐보지 못한 잘못을 남의 눈으로 자신을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일득록(日得錄)’은 본래 21개 항목으로 편찬되었으나, 저자 남현희(南賢熙) 님은 이 책을 12개 항목으로 재편하여 이해하기 힘들고 중복된 것을 제외하고, 거기에 약간의 평설을 달아놓았습니다.

먼저 성심(省心)입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모든 행위와 지각의 주체입니다. 마음이 좋아야 사람이 좋고, 사람이 좋은 뒤라야 말이 좋습니다. 마음을 천군(天君)이라 합니다. 그가 극도로 경계한 것은 분노입니다. “분노가 막 치밀어 오를 때 사리를 살피지 않고 먼저 소리를 지르고 성질을 부리면 분노가 더욱 치밀어 일을 도리어 그르쳐서 분노가  사그라진 이후에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아마 이는 비운의 사도세자 가르침일 것입니다. “사람의 칠정(七情) 가운데 분노가 가장 참기 어렵지만, 한때의 분노를 잘 참아 내면 후회의 탄식이 없을 것이다.”

처기(處己) 편입니다. “사람은 막말로 한 때의 쾌감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미천한 마부에게도 일찍이 이놈 저놈하고 부른 적이 없다.” 모든 일에도 절제가 있습니다. 정조는 신하들과 함께 과녁에 활쏘기를 하였는데 정중에 49발을 맞추고, 50번째 화살은 늘 정곡을 살짝 빗나갔습니다. 그는 활쏘기에서도 백발백중을 경계했습니다.

학문(學問)에 관한 견해입니다. 선비들이 최초로 공부할 것은 뜻을 확립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세태에 따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학자와 정치가는 확고부동한 제 뜻이 없는 것입니다. 정조는 문풍을 그르친 원흉으로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지목하였습니다. 당시 유행인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를 지독히 싫어했습니다. 실용적이지 못하고 마음을 방탕하게하기 때문입니다. “학문이 정도(正道)에 보탬이 없다면 학문이 없느니만 못하고, 문장이 실용(實用)에 합당하지 못하면 문장이 없느니만 못하다.”

처사(處事)편 입니다. 정조는 결단력이 강한 군주입니다. 세간에 떠도는 말이 많더라도 하는 일이 도덕성과 타당성을 갖춘 것이라면 흔들리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고, 떠도는 말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장용영(壯勇營)이나 규장각(奎章閣)을 신설할 때 그랬습니다. “일을 할 때 열에 일곱 여덟이 좋으면 해야 하고, 나머지 한두 가지 다 좋기를 바랄 필요는 없다. 다 좋기를 바란다면 용감하게 결단하는 때가 드물다.” 그의 지론은 문무 겸비입니다. 시간만 나면 무예를 익힙니다. 활쏘기의 묘미는 정신을 집중하는 데 있고, 표적이 작을수록 정신이 더 집중해져 그는 실제로 아주 작은 과녁을 즐겨 썼습니다.

사절(士節) 편입니다. 사대부의 명예와 절개에 관한 것입니다. 18세기 조선에서 선비는 오피니언 리더 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조는 선비라면 처음 벼슬에 나섰을 때 마땅히 추자도나 흑산도로 유배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시 추자도나 흑산도에 유배는 가장 큰 형벌입니다. 장악원(掌樂院)에 음악에 관하여 지시합니다. 음악은 정치와 연관이 있고 세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오늘날 음악이 느긋하고 천천히 하는 데 힘쓰라고 지시했습니다. 정조는 음식은 백성의 하늘이라 단 한 톨이라도 아꼈습니다. 식사도 입에 맞는 한 그릇으로 족하고 낟알을 햇볕에 말릴 때 몇 톨이라도 낟알이 자리바깥에 떨어져 있으면 내시를 꾸짖고, 먹 하나 종이하나라도 낭비하지 않고 썼으며, 신하들의 접견하는 곳의 깔개도 반 이상이 헤어져야 비로소 바꾸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군자는 평이한 곳에 천명을 기다립니다.

애민(愛民)편입니다. 정조는 시급한 것이 민생이라 보았습니다. 항산(恒産), 사람의 생존에 꼭 필요한 물질적 토대를 충족하지 않고서 나라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덕본재말(德本財末), 덕을 근본으로 하고 재물을 말단으로 삼아야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는다.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겨울에 큰 눈이 내렸습니다. 대궐 뜰의 제설작업은 인근 백성들이 하였습니다. 정조는 두껍게 옷 입은 나도 추운데 그런 수고로움을 하면 내 마음이 편치 않으니 그냥 두도록 했습니다. 정조가 병을 앓고 있을 때 연해 고을에서 전복을 따 바쳤습니다. 전복하나 바치는데 드는 비용이 수십 금이나 되니 수고롭게 하지 말라 했습니다. 경연하던 신하가 백성들의 건의가 매우 무례하고 난잡하다고 하자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하소연하는 것과 같다. 저들은 죄가 없다. 그렇게 만든 자들이 죄다” 저녁 수라 때 내시가 소반을 떨어뜨려 큰소리가 침소까지 들리자 정조는 느긋하게 하교하였습니다. “다친 사람 없느냐? 사람이 중요하다. 깨진 그릇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정사(政事) 편입니다. “경제니 민생이니 떠드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경제와 민생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데 고심하는 사람은 적다.” 정조는 일선 신하들이 올리는 건의문을 건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인재의 편중을 지적했습니다. 이조 중엽 이전에는 명신과 보좌하는 신하들이 먼 시골이나 지방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나 중엽 이후에는 소수의 특정 세력,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와 충청도의 세가(勢家)에서 나왔고 대대로 세습하여 장기적으로 집권하였습니다.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해주는 환곡(換穀)과 국가의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비축해두는 군량 제도인 군향(軍餉)은 조선 후기에 와서 백성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온갖 부정이 저질러졌습니다. 암행어사를 수시로 파견하여 바로잡았던 정조는 민심을 중히 여겼습니다. “성쇠와 강약은 병력에 달려있지 않고 나라의 형편인 국세(國勢)에 달려 있고, 인심(人心)에 달려있다. 진실로 국세가 공고해지고, 인심이 기쁘게 따른다면 홍수나 가뭄, 도적은 근심할 게 못된다.”

형정(刑政) 편입니다. 정조는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인지라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관대한 것은 인지상정이나 법 적용만은 반드시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조 18년 정약용이 경기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김양직과 강명길의 비리를 적발하여 보고하였습니다. 김양직은 사도세자의 능을 이전한 지관이고, 강명길은 혜경궁 홍씨의 병을 돌 본 태의(太醫) 출신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아 현감과 군수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정조가 이들을 용서하려 하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즉각 상소 올려 항의하였습니다. 정조는 결국 처벌하였습니다. 정조도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옥사를 판결한 뒤에는 며칠 동안 잠을 잘 자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판결했는지 고심하였습니다. 선전관 가운데 왕명을 어긴 자가 있어 왕이 진노하여 곤장을 쳐서 기강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왕은 먼저 집안에 병든 아이가 있느냐를 물었습니다. 자식이 병으로 누워있는 상태에서 아비마저 곤장을 맞고 눕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하여 배려하였습니다.

임영호우송정보대 특임교수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마지막으로 훈어(訓語) 편입니다. “평생토록 깊이 간직할 것은 무물아(無物我) 세 글자뿐이다.” 상대와 나를 구분하려는 의식 때문에 대립과 갈등이 생깁니다. 무물아(無物我)는 나와 다른 입장·의견·사상을 배척하지 않고 포용할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됩니다. 위대한 생각은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정조는 임금의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뜰의 풀이 우거진 곳에서 숯을 피우자 이제 살려고 막 푸릇푸릇 자라고 있는데 불길 속에 타죽게 할 수 없다며 옮기라고 지시했습니다. 정조에게 풀조차도 생명으로 보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즉위 때부터 타던 20년 이상 된 말이 눈이 멀어 더 이상 탈 수 없어도 의장마(儀仗馬)로 데리고 다녔습니다. 자기를 위해 봉사했던 말의 공덕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정조는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성균관 시험답안지 중 임금을 칭송하고 찬미하는 구절이 있자 제일 낮은 점수를 주도록 명하였습니다. 정조 즉위년 신하들이 자신을 탄핵하자 어떤 자가 정조는 성인(聖人)이라는 취지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정조는 그를 파직하였습니다.

정조의 언행은 시간을 초월하여 여전히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반추시키고 우리 시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합니다. 음미하면서 읽느라 시간은 걸립니다. 인간 정조의 위대함이 묻어납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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