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 홍경석 수필가] 나는 쉰 살에 대학에 갔다. 내 나이 오십, 즉 지천명(知天命)에 대학을 간 것은 지천명의 의미처럼 거창하게 하늘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단순하게 아들과 딸, 그리고 후일 며느리와 사위라는 또 다른 딸과 아들을 얻을 것인데 그들에게도 시쳇말로 ‘쪽 팔리지 않기’ 위함에서였다. 즉 “우리 시아버지(장인)는 고작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 한 무지렁이야.”라는 비웃음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때문이었다.
나와 같은 베이버부머 세대는 익히 경험하였겠지만 당시엔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겨웠다. 따라서 국민(초등)학교조차 겨우 마치고 상급학교인 중학교라곤 문턱조차도 밟아보지 못 한 아이들도 속출했다.
"동기생들중 가장 고령 그러나 기죽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질문했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 결과 3년 뒤에는…"
그중의 하나가 바로 나였다. 더욱이 나는 엄마조차 없는 ‘가련한 아이’에 속했다. 따라서 아무리 반에서 1~2등을 질주했던 우등생이었을망정 등록금조차 낼 수 없는 가난한 처지의 빈가(貧家), 그것도 알코올중독자인 홀아버지의 장남으로선 중학교 진학이 사치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설상가상 소년가장까지 된 나는 고향역 앞에서의 구두닦이를 시작으로 이 험한 세상과 만나야 했다. 그러다가 비가 쏟아지면 우산을 떼다 팔았고 나이가 더 들어선 공사장에 나가 막노동으로 입에 풀칠을 해야 했다.
돈이 들어가는 학원 수강 등의 사교육 대신 주말과 휴일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면 공짜였다. 또한 일정기간 빌려주기까지 하여 정말이지 참으로 많은 책을 섭렵(涉獵)할 수 있었다.
그러한 덕분이었는지 아무튼 지역거점대학인 충남대에 들어간 아들에 이어 딸은 서울대에 합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게‘잘 나가는’ 아이들에 비해 여전히 나의 위상은 초라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3년 과정의 사이버대학 신입생 모집과정을 어떤 책의 말미에서 만나게 되었다. 등록금도 착했고 매월 2회 이상의 오프라인 수업도 있다는 점이 더욱 맘에 들었다.
입학자격은 수십 년 동안이나 축적한 방대한 독서와 치열한 독학이란 내공이 한몫 거들어서 문제가 없었다. 입학하고 처음으로 맞은 오프라인 수업. 동기생들 중 내가 가장 고령이었다.
그러나 기죽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질문했고 공부 역시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 결과 3년 뒤의 졸업식 때는 졸업장 외에도 별도의 학업우수상까지 수상할 수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것을 나는 실증적으로 입증(立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