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숨] 방송작가가 꿈이었던 아이
[세상의 숨] 방송작가가 꿈이었던 아이
⑪ 2018. 11 세월호 희생자 故 박혜선 양을 기억하며
  •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 승인 2018.11.2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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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기자]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이 각오처럼 또 참사의 아픔에 공감하는 뜻으로 가장 많이 해왔던 말이다. 참사를 잊지 않겠다는, 참사의 교훈을 되새기겠다는 ‘기억’의 의미일 것이다. 그 말의 한 조각에 ‘삶’을 덧대어 본다. 정현종님의 시 <방문객>의 구절이 떠오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중략)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세월호 304개의 별, 박혜선 양을 기억하며…

 사람이 온다는 것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세월호 안에 있던 304개의 별들의 삶을 떠올려 본다. 오늘은 2학년 2반이었던 故박혜선 양이 시간의 숨 속으로 찾아왔다. 혜선양의 어머니인 임선미 씨에게 그의 삶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박혜선 양은 둘째 딸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음악과 예능에 소질을 보였다. 특히 노래를 잘 해 음악 쪽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꿈이 같았던 언니에게 먼저 교육의 기회를 양보했다.

“원래는 혜선이가 언니보다 훨씬 음악을 잘했어요. 언니한테 양보하게 한 거죠. 언니가 보컬을 준비하며 실용음악과에 들어가기로 한 거죠. 한 집에 두 명이 음악을 하기가 어렵잖아요. 자연스럽게 혜선이는 부담이 될까봐 진로를 틀었어요. 그게 방송작가와 국어 선생님이었죠. 이렇게 갈 줄 알았으면, 마음껏 꿈이라도 꾸게 해 줄 걸... 돌아보면 그게 마음이 걸려요.”

늘 긍정적이고 밝았던 혜선 양은 좌절하지 않았다. 언니만 예뻐한다며, 엄마에게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지만 요즘 말로 ‘쿨’하게 양보하고 자신의 새 진로를 찾기 시작했다. 박혜선 양은 이후 꿈을 바꿔, 방송작가와 국어 선생님이 되기로 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 쓰기를 잘해 상도 곧잘 받아 왔던 혜선이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가 한창 진로를 고민하던 때 만난 담임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치던 단원고 2학년 2반 故 전수영 선생님이었다.

“전수영 선생님이 혜선이 1학년 때부터 담임이셨어요. 2학년 때 또 올라가 만나게 된 거요. 전수영 선생님을 한 해 더 보고 자라니까, 아무래도 영향이 있었나봐요.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기 전, 전수영 선생님과 진학상담을 했었나봐요. 혜선이가 문예창작과 쪽을 선택하려니까, 선생님께서 국문과 쪽이 앞으로 폭이 더 넓을 거라고 말씀하셨데요. 그리고 집에 와서 혜선이가 저에게 호언장담을 했죠. ‘엄마! 나 동국대 국문과에 들어가기로 했어. 수학여행 다녀와서 열심히 공부 할 거야!’”

임선미 씨는 그때 알았을까. 그 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선물을 했을까. 혜선양의 어머니 임선미씨는 혜선이에게 마지막으로 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로맨스가 필요해」

‘박혜선에게 엄마가! 모태솔로 탈출을 기원하며, 2014년 어느 날...’

“제가 개방적인 편은 아닌데요. ‘모태솔로 탈출을 기원하며’ 이렇게 적어서 책을 선물했어요. 지금 살아있다면 아마 근사한 연애도 하고 글도 쓰고 대학을 다니고 있었을텐데...”

혜선이가 뭍으로 돌아오던 날...

우리에게 ‘가정법(IF)’이 통한다면, 과연 삶의 어느 지점에 ‘IF’를 붙이고 싶을까? 임선미 씨에겐, 그리고 많은 사람이 주저하지 않고 바로 그날로 돌아간다고 할 것이다. 2014년 4월 15일, 참사가 일어나기 전 그날 말이다.

“혜선이가 수학여행을 가는데, 캐리어 가방을 난생 처음 끌고 갔거든요. 1층까지 캐리어를 들어다 주는데, 큰 가방을 끌고 가는 게 쑥스러웠나봐요. ‘엄마, 이거 나만 끌고 오면 어떻게?’ 이러는 거에요. 참 착하고 순수한 아이였죠? 알고 보니 다들 캐리어를 끌고 왔더래요. 그러고 갔어요. 인천에서 배가 떠나기 전에 혜선이에게 문자가 왔어요. ‘엄마, 벌써 엄마가 보고 싶어!’ 이랬는데, 제가 농담삼아 ‘거짓말 하지마~’ 라고 보내니까 혜선이가 ‘맞아, 뻥이야!^^’하고 장난을 쳤어요. 그러고 배가 떠나자 사진을 찍어 보내주더라고요. 그게 마지막 사진이 됐어요.”

혜선이는 5월 4일 일요일에 뭍으로 올라왔다. 대통령이 팽목에 온 날이었다. 그날 혜선이 어머니 임선미 씨는 안산에 있었다.

“애들이 하도 안 올라오니까 별 소문이 다 돌았어요. ‘안산 집에 가서 엄마가 청소하고 밥해놓고 기다리면 온다.’는 말도 있었죠. 그래서 새벽에 팽목에 내려왔다가 밤에 또 안산으로 올라 가곤 했죠. 집에서 청소를 싹 하고 혜선이가 좋아하는 쌀밥을 해놨죠. 그랬는데도 안나오는 거에요. 일요일이었을 거에요. 안산에서 친구와 새벽미사를 봤어요. 미사를 보고 나오는데, 친구가 이상한 말을 하는 거에요. 저와 세레명 같은 친구가 꿈을 꿨다면서 ‘선미야, 걱정하지마. 혜선이 분명히 나와. 친구가 꿈을 꿨는데, 혜선이가 나왔대...’ 그 날 거짓말처럼 혜선이가 나왔어요. ”

뭍으로 나오던 날, 혜선양의 주머니에서는 휴대폰과 안경닦이, 챕스틱이 있었다고 한다. 평소 소박하고 순수했을 것 같은 혜선양의 모습이 문득 그려졌다.

11월 1일 혜선 양의 생일에 생전의 꿈을 이루다.

임선미 씨는 올해도 아픈 생일을 보냈다. 둘째 딸의 생일이 다가오면 그렇게도 아프다고 했다. 혜선양의 언니는 사고 이후, 더이상 노래를 할수 없어 그만두게 됐다. 임선미 씨는 슬픔을 참아내며, 꾹꾹 눌러 혜선양에게 하늘의 편지를 써 보냈다.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썼냐고 물으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늘의 편지를, 주인공은 읽었겠지. 엄마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고 있으리라.’ 하며 필자는 물음을 멈추었다.

지난 11월 10일 토요일, 방송작가 노동조합인 방송작가유니온에서는 뜻깊은 자리를 마련했다. 박혜선 양의 생전 꿈이었던 ‘방송작가’를 기억하며, 박혜선 양을 대신해 어머니 임선미씨에게 방송작가·명예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에 위촉하기로 한 것이다.

“혜선이는 유머가 풍부해서 개그콘서트나 런닝맨 같은 예능프로그램 작가 되고 싶어했어요. 구체적으로 글공부를 해서 드라마 작가도 되고 싶었죠. 물론 엄마는 조금더 안정적인 직업을 구했으면 했구요. 우리 딸의 꿈을 이렇게라도 이루게 됐네요.”

딸의 명예방송작가 위촉장을 받으러 가는 엄마의 표정과 발걸음이 떨려 보였다. 박혜선 양의 위촉장을 받아안은 엄마 임선미 씨는, 한사코 발언을 만류하다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세월호 사고가 아직 끝난 줄 아세요? 우리 아이들 아직 다 흩어져있어요. 아이들 엄마아빠 있는 곳으로 모으는 게 저희들 바람이에요. 안산화랑유원지에 추모공원을 세우는 일이죠. 납골당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아요. 그럴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듯 마음이 아프죠. 우리 혜선이를 기억해주실 때까지, 세월호 참사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인데... 한 사람이 간다는 건, 또 보낸다는 건 어마어마한 아픔을 감내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가 있었다는 것, 그가 꿈꿨던 것, 스쳐가는 작은 옷깃의 느낌, 마지막으로 나눴던 따뜻한 말 한마디까지.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든 순간이었던 박혜선 양에 대한 기억 조각조각을 어머니 임선미씨의 동의를 받아 남겨본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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