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섭의 그림읽기] 타국에서의 고단한 삶을 은유하는 냉기
[변상섭의 그림읽기] 타국에서의 고단한 삶을 은유하는 냉기
조양규 作 ‘31번 창고’
  •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 승인 2018.11.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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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고독과 피곤, 쓸쓸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마치 하루 일과에 녹초가 된 현대인의 자화상 같다. 하지만 50년도 훨씬 더 된 작품이다.

'근대의 초상'이란 표현이 적절하지만 이미지는 동시대적이다.  조양규(1928-?)의 ‘31번 창고(1955)’다.

작품 감상의 키워드는 곧 작가의 이력이다. 삶이 파란만장하다. 진주사범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교편생활 중 제주 4·3사건에 연루되면서 1948년 일본으로 밀항을 했다.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일본서 창고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작품활동을 하던 작가는 1968년 어느 날 북송선을 탔다. 그 후 1년간 체코 유학을 한 후 행방이 묘연하다.

조국이 있지만 철저한 경계인이자 주변인으로 산 것이다. 그는 북송 전 “조선의 풍경도 조선인의 풍모와 거동도 기억과 상상을 통해서 밖에 알 수가 없는 게 내게는 답답한 일이다.

북조선에서는 도구도 표현도 일본보다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공중에 매달린 듯 어중간한 지금의 상태를 벗어나 조국의 현실 속에서 싸우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반체제 인사라 남쪽을 택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북송선을 타게 된 지식인의 고뇌와 안타까운 심정이 배어 있다. 10년간 일본 생활을 했지만 역량 있는 화가로 성공할 만큼 현실 적응을 제대로 못한 나머지 북송을 귀국으로 여긴 모양이다. 작품은 고단했던 일본 생활의 편린이다.

큰 몸통과 팔다리에 비해 머리는 지나치게 작다. 소외된 삶과 자아가 결핍된 육체 노동자를 그렇게 묘사했다. 배경은 육중한 철문이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창고 안은 칠흑처럼 어둡다.

이방인의 고단한 삶을 은유하는 듯 냉기가 감도는 분위기다. 어둠은 노동을 통해 얻은 결과물들을 빼앗아가는 통로는 아닐까. 손에 들려 있는 채워지지 않은 홀쭉한 자루가 이를 암시하고 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주인공인 이명규의 실제 모델이 조양규라는 얘기도 있다. 화가로서 확실한 족적을 남겼음에도 격변기에 이념의 희생양이 돼 남과 북 모두에서 잊혀진 작가가 됐다가 근래 들어 조명을 받고 있다.

‘31번 창고’도 미술잡지가 선정한 ‘한국 근대 유화 10선’에 오른 꽤 유명세를 타고 있는 그의 작품 중 하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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