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곳에 가면 이야기가 있다] 그날, 3월 8일과 오늘
    [그곳에 가면 이야기가 있다] 그날, 3월 8일과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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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 승인 2018.11.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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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모닝충청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기자] 역사는 수많은 사건들이 연결되며 이루어진다. 그 사건들 중 어떤 것은 역사의 큰 물줄기를 크게 다잡아놓았으며 또 어떤 것은 그 변화의 시초로 의미를 깊게 새기고 있다. 1960년에 일어난 4·19의거가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꾼 커다란 사건이라고 한다면 그 이전에 대전에서 일어난 3·8민주의거는 큰 변화의 방아쇠 역할을 한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2018년 11월 2일, 우리 지역에서 불꽃처럼 타올랐던 3·8민주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공포되었다. 이는 민중의 힘으로 이뤄낸 역사적 사건을 전체적인 맥락을 따라 모두 인정한 일이라고 볼 수 있어 여러모로 뜻 깊다. 지난 22일, 그날 학생들이 열기로 후끈했던 옛 충남도청에서 3·8민주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일을 되새기는 행사가 열렸다.

    ‘그날, 3월 8일’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날 행사는 오후 5시로 예정되었다. 행사를 앞둔 4시 40분 경, 옛 충남도청 앞 지하상가는 건장한 청년들로 가득 차 사람이 지날 수 없을 정도로 후끈한 상황을 연출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이 이날 행사장 앞길을 가득 채웠던 청년들은 다름 아닌 대전고등학교의 학생들로 3·8민주의거 주역들의 60년 후배들이다. 당시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주역들이 백발을 휘날리며 자랑스럽게 행사장을 찾았고 손자뻘의 후배들은 선배들의 용기와 상처를 기리기 위해 기꺼이 달려온 것이다.

    대전에서 일어난 3·8민주의거는 자유당의 독재와 인권탄압에 분연히 일어난 대전 학생들의 외침이었다.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 전국은 부패정권의 탄압에 저항해 들끓고 있었다. 2월 28일 대구에서 규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후 3월 8일 대전에서 의거가 일어났으며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이렇게 남쪽에서 연이어 일어난 운동들이 바로 4·19혁명을 이끌면서 결국 이승만을 하야시키는 민중의 승리로 이어진다.

    대전의 3·8민주의거는 3월 8일부터 10일까지 이어진 뜨거운 시위로 독재정권에 대항하고 학생들의 인권을 부르짖은 민주화 운동이다. 그 발단은 8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계획되었던 야당 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였다. 이 유세를 계기로 대전의 8개 고등학교는 연합 시위를 계획한다. 그러나 정보가 새어나가 대부분의 학교가 기말고사를 앞당겨 치르게 되면서 학교에 붙잡혀있게 되고 이에 따라 경찰의 감시가 심해진다.

    이후의 얘기는 행사장을 찾은 당시의 주인공에게 들어보았다.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행사를 지켜보던 한 분께 무작정 질문을 던졌다. 마침 그는 대전고등학교 40회 동창회장을 맞고 있는 김민철 선생님이었고 기다렸다는 듯 답을 주었다.

    “그때가 3월 8일이었어요. 마침 공설운동장에서 박순천 여사하고 장면 씨가 유세를 하기로 했었는데 학교에서 전혀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뿐 아니라 학생으로서 여러 가지로 자유가 억압되었던 시절이었어요. 한 학생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우리 대전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은 민주화를 외치면서 교정을 뛰쳐나가서 공설운동장을 향해 행진했죠. 그런데 대흥동 사거리에서 기다리던 경찰들이 다짜고짜 곤봉 세례가 있었어요. 개머리판으로 때리기도 하고 정말 인정사정없이 무자비했었죠. 그렇게 공설운동장 쪽에 가니까 이미 기마경찰들,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아예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무력 진압은 계속 이어졌고 학생들은 흩어졌지요.”

    행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조금조근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때는 공설운동장 주변이나 전부 논이었어요. 정신없이 논 가운데로 정신없이 도망가다가 거름을 만들기 위해 인분을 채워놓은 거름통에 빠지는 학생들도 많았죠. 뭐가 뭔지 구별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뒤에서 경찰들이 곤봉으로 때리면서 쫓아오고. 거기서 대전천을 건너면 인동이죠? 인동 시장 있는 쪽에서는 도로 포장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도로에 바르는 콜타르라고 시커먼 기름 있잖아요? 그때 경찰들이 그 콜타르를 학생들에게 마구 뿌려댔어요. 그렇게 무자비하게 체포 작전을 벌여서 많은 학생이 연행되었고 저도 잡혀 들어가서 고생했어요. 그날 하루만 해도 70~80여 명이 연행되어서 고생하고 있는데, 저녁때에 교장선생님이 찾아오셔서 사정하고서야 겨우 경찰서를 나와 학교로 돌아왔다가 집에 들어갔어요.”

    그때 대전고등학교 40회가 2학년이었고 한다. 당시에는 새로운 학기가 4월에 시작되는 학제였기에 곧 2학년이 되는 1학년 후배들이 함께 했고 3학년은 이미 졸업을 한 후였다. 그러니까 2학년이 학교의 주역이기도 했다. 이들의 감회 또한 남달랐다. 

    “우리는 3·8민주의거의 의의를 기리고 그날의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계속 활동해왔습니다. 이렇게 국가기념일로 지정이 되어서 고생한 보람 크죠.”

    짧은 시간 동안 나눈 대회였지만 그날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분주하게 이어지는 행사 중에 또 한 신사분이 눈에 띄었다. 큼지막한 카메라를 들고 분주하게 행사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는 은발의 주역이었다. 먼저 성함이 궁금했다. 

    “최우영이라고 합니다. 한동안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의 대표를 맡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오늘 행사를 비롯해 3·8민주의거와 관련된 일들을 기록하고 있어요. 저도 그날 현장에 있었지요.”

    대전고등학교 40회 동창회장 김민철 선생님
    최우영 선생님
    최우영 선생님

    잠깐 대화를 나누면서도 삼각대에 고정해놓은 카메라가 잡고 있는 행사의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저도 같이 행진하고 또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행진하다가 경찰한테 쫓기고, 주변 학생들이 거름통에 빠지고, 갑자기 앞에 기마병들이 나타나서 흩어지고, 맞고, 저는 그날 잡혀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많은 학생들이 고생했습니다. 선생님들까지 연행되었어요.”

    이번 지정에 대한 감회 또한 남다르다고 했다.

    “먼저 우리 시민들의 뜻이 반영되고 인정을 받은 것이잖아요. 당연히 좋죠. 그리고 이 정신을 쭉 이어가기 위해 계속 활동해야죠.”

    옛 교복을 입은 그날의 주역들이 단상 위에 올랐다. 새롭게 그날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자 백발의 사진기자는 카메라를 뽑아들고 재빨리 무대 앞으로 달려갔다.

    이어 무대 위의 옛 학생들과 행사장을 가득 메운 지금의 학생들, 그리고 많은 참석자 들이 함께 만세를 외쳤다. 대한민국을, 3·8민주의거를, 그리고 대전시를 위한 만세였다. 마지막으로 낭송 시 「내 오라버니의 3월」중 일부를 인용해본다.

    ……

    그래 총칼의 모독에 항거한 거야

    못생긴 정권에 궐기한 거야

    새까만 독재타도에 앞장 선 거야

    나에게

    그 3월을 가르쳐준

    오라버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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