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낙랑 421년 존속? 후한 말 189년 수명 다해
[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낙랑 421년 존속? 후한 말 189년 수명 다해
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는 조한전쟁의 비밀 ⑥ 한사군 명칭 유래·존폐 과정
  • 김탁
  • 승인 2018.12.0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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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은 421년간이나 존속했는가 ?
소위 한사군을 고찰함에 있어서 낙랑군은 그 핵심이라고 할수 있다.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종주국인 한나라는 전한은 AD 8년,
후한은 AD 220년에 망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종주국이 사라진 마당에 그 식민지는 100년이나 더 존속했다가 AD 313년에 망했다고 할수 있겠는가 ? 더구나 강단사학의 주장에 따르면 낙랑군을 북한 평양에 설치되었다고 했는데 종주국 한나라가 망해버린 상태에서 식민지 낙랑군이 무슨 수로 대륙과 멀리 떨어진 한반도에서 독야청청 생존할수 있었겠는가 ? 더구나 대륙과 한반도 사이에는 강성한 고구려가 버티고 있었는데 작은 식민지 군현 하나를 정벌하는데 고구려가 100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할 정도로 약체이었던가 ?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 편의상 중원지역에서 일어난 왕조시대순으로 낙랑지역의 흥망사를 살펴보는 것은 복잡한 낙랑변천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다.

가. 전한 시대(BC 206 - AD 9)
위만조선이 멸망한 해가 BC 108년이니 이로부터 전한이 망한것은 약 98년후이었다. 이 시기는 낙랑에 대해서 특기할 만한 변동사항이 없고 다만 진번과 임둔을 파하고 낙랑,현토에 합병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앞에서 언급했다. 한사군이 무제가 설치한 군현이 맞다면 당연히 관리의 임명사실과 통치행태를 밝혀주는 기록이 나와줘야 하는데 <사기> <한서><삼국지> <후한서>등 소위 전前4사에 이러한 구체적인 기록이 전무하다.

나. 후한시대(AD 25 - 220)
광무제 유수가 왕망에게 찬탈당하고 망해버린 전한을 이어서 한나라를 재건하고 후한을 건국한 이후에 고구려와 낙랑을 두고 쟁탈전을 벌인 사실을 <후한서> < 삼국사기> 등이 전하고 있다.

“건무 6년(AD 30년) 초 낙랑인 왕조王調가 그 군에 의거하여 복종하지 아니하는지라(王調據郡不服) 이해 가을, 낙랑태수 왕준王遵을 보내어 공격하니 군리郡吏가 왕조를 살해 투항하므로 전장군 前將軍 이통李通이 두 장군 및 공손술과 함께 싸워 서성西城을 파하다” <후한서 광무제기>

주석에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樂浪郡 故朝鮮國也)라고 하여 낙랑은 옛 조선이었음을 명시했다. 즉 낙랑인(조선인) 왕조가 낙랑내의 토착 조선인 세력을 믿고 한나라에 불복하므로 군사를 보내서 격파했다는 내용이다.

“대무신왕 27년 (AD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는 군사를 바다건너 보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다. 살수 이남은 한나라에 속했다. 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以南屬漢 <삼국사기>

“(광무제)건무23년(AD 47) 겨울에 (고구려)잠우부락의 대가재승이 1만여인을 이끌고 가서 낙랑군에 내속하였다 建武二十三(AD 47)年 冬 句麗蠶友落 大加載升等 萬余口 詣(이름예)樂浪內屬)”<후한서 동이전 고구려조>

다. 조위시대(220-265) - 공손씨 독자세력 형성과 요동연국遼東燕國 건립
후한 말엽에 위, 촉, 오 삼국이 패권을 다투는 대 혼란기를 거쳐서 조조의 아들 조비가 황제가 되어 위나라를 건국했다.

동탁이 후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동탁의 심복인 중랑장 서영徐榮이 요동군 양평현 출신이라 동향출신인 공손도를 요동태수로 추천하였다. 이 때가 후한 중평6년 AD 189년이었다. 정치적인 야심과 능력을 고루 갖춘 공손도는 요동지역을 평정하고 중원과는 별도의 독립지방정권을 수립했다. 따라서 공손도가 요동에 세력을 떨치면서 한나라 직할령으로서의 낙랑군은 의미를 상실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군은 후한 말엽인 189년에 수명이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공손도는 그 이름이 중앙에 알려지자 많은 인물들이 중원의 혼란을 피해서 요동에 와서 그에게 의탁했다. 고구려 8대 신대왕 15년(179)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신대왕의 장남 발기拔奇(9대고국천왕의 아우로서 형수인 우씨의 농간으로 동생인 산상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發岐와는 한자가 다름, 공손도에게 군사 3만을 빌려 고구려를 치다가 패하여 자살했음)가 소노가消奴加의 하호下戶 3만을 이끌고 공손도에게 귀순함으로서 공손도가 요동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공손도는 요동군을 요동, 요서, 중료군으로 나누어 태수를 두고 산동반도 동래에 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영주자사가 되었다.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을 자처하고 천자의 위의를 갖추고 천자만이 탈수 있는 수레를 타고 다녔으니 중원의 혼란을 이용하여 요동에서 독자왕국을 건설한 것이나 마찬가지이었다.
"初平元年(194) 乃分遼東 爲遼西 遼中郡 竝置太守 月海東萊諸縣 爲營州刺使 自立爲遼東侯" <삼국지>

"公孫淵 乃父子三世 有遼東 天子爲其絶域" <삼국지 위서 동이전><삼국지 위서 동이전>

204년 공손도가 죽고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이어받아서 206년에는 낙랑군의 남부에 위치한 대방현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으니 이것이 대방군의 시초이다.

공손강이 죽고 아들 공손연公孫淵이 요동, 요중, 요서, 대방, 낙랑 등지를 강역으로 하여 연국燕國을 설립하고 스스로 연왕을 자칭했다. 공손연은 233년 후한 삼국중의 하나인 오왕 손권으로 부터 연왕의 봉작을 받고 오나라에 신사臣事하였다. 오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던 위나라는 배후에서 오나라와 내통하는 공손연을 그냥 방치할수 없기 때문에 사마의로 하여금 정벌케했다. 이때 고구려 동천왕은 장병 1천명을 보내서 사마의와 합세하여 연국을 멸하니 공손씨 3대는 공손도가 요동태수로 부임한지 50년만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공손씨 3대가 요동을 지배한 시기는 189년부터 위나라 사마의와 고구려 연합군에게 토벌당한 238년까지 약 50년이었다.

238년 공손연을 멸한 위나라는 낙랑 대방 2군을 영유하고 태수를 임명하였으며 고구려와 직접대치하게 되었다.

242년 고구려 11대 동천왕은 서안평을 점령하여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원인이 되었다. 위나라는 238년에 요동연국을 토벌할 때에 요동을 고구려에 반환하는 조건으로 고구려가 참전하도록 유인하였으나 위나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격노한 동천왕은 대병을 동원하여 서안평을 점령해 버렸다. 244년 위나라의 명장 관구검毋丘儉이 1차로 침공했으나 고구려군에게 패배하고 격퇴당하였다. 245년 2차 침공으로 고구려는 수도 환도성을 점령당하고 남북 옥저까지 패주하였으니 밀우密友의 분전과 유유紐由의 계략 덕분에 적장 왕기를 죽이고 격퇴할 수 있었다.

고구려 동천왕(227-248)의 업적을 연대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36년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와 화친을 추진함
-238년 위나라와 합동으로 공손씨 세력을 토멸
-242년 위나라 서안평을 공격
-244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1차 고구려침공 격퇴
-245년 관구검의 2차 침공으로 환도성 함락(247년 평양성으로 일시 천도)
-245년 위나라 정시正始6년 위나라는 낙랑태수 유무劉茂,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영동지방을 위나라에 예속시키니 고구려가 응전하였으나 불내후不耐侯가 읍을 들어 항복하였다. <위서 동이전 예濊조>
-259년 12대 중천왕때에 위나라가 침공해 왔으나 기병 5천을 왕이 인솔하고 적병 8천을 목베었다.

그후 위는 진한辰韓의 옛 땅을 낙랑군지에 예속시키고 토착관리들을 차별대우하자 이에 신지臣智 격한激韓이 크게 노하여 대방군을 공격했다. 이에 대방, 낙랑 양 태수가 응전하였으나 위군이 대패하여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했다. 이로서 대방 낙랑 양군은 위나라가 멸망하기도 전에 고구려에 의해서 토멸되고 말았으니 이것은 동천왕에 의한 1차토멸이었다(遵戰死 二郡遂滅) <위서 동이전 한韓조>

라. 서진西晉(265-316, 동진317-420)에 의한 대방, 낙랑군의 부활과 5호16국시대의 개막.
위나라를 이어서 등장한 서진은 건국 12년만에 대방, 낙랑, 현토 3군의 땅을 접수하고 대방, 낙랑 양군을 부활하여 평주에 소속시켰다가 후에 유주幽州로 합하였다.

“咸寧二(276)年 十月 分遼東 昌黎 玄兎 帶方 樂浪 五郡爲平州 後還合爲幽州” < 진서 지리지>

서진은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의 맞수로 등장하는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조씨가 세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이다. 무제 사마염이 죽고 어리석은 2대 황제 사마충(290-306)이 등극하면서 부터 지방의 군사권을 가진 사마씨 왕족간에 죽고 죽이는 소위 8왕의 난(291-306)이 일어났다. 중원은 15년간 동족상잔의 대혼란기를 맞이했고 이로 인하여 지나 역사상 한족들이 가장 수치스러워 하는 5호16국시대(304 -439)가 개막되었다. 사마씨 왕들은 자신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북방민족을 용병으로 활용했고 서진이 약체임을 간파한 흉노, 선비. 강족과 같은 유목부족들이 자립하여 중원으로 치고 들어오니 서진(265-316)은 멸망해 버렸다.

고구려 미천왕의 완전한 고토수복
중원의 대혼란기를 틈타 서진이 대방, 낙랑, 현토 3군을 접수한지 38년후에 고구려 15대 미천왕(300 -331)은 일대 수복전을 감행하여 한무제 이후 잃어버렸던 옛 고토를 완전히 수복하였다. 이로써 낙랑군이라는 명칭은 서진시대에 와서 영원히 소멸되었고 중국문헌 기록에도 더이상 나타나지 아니했다. 낙랑군의 군치이었고 위만조선의 왕험성이었던 조선현이라는 명칭 역시 <수서 지리지>에 등장한 이후에 문헌상 더이상 기록되자 아니하였다. 고조선 이래 조선족의 활동 중심지이었던 낙랑군이라는 명칭은 중국대륙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학계에서는 한사군으로서 낙랑군을 고구려가 완전히 수복한 때를 이 시점으로 보고 있다.

미천왕의 고토수복 과정은 이렇다.
-302년 3만군으로 현토군을 공격 함락시킴. 8천명 사로잡음. 현토군은 태조대왕 69년(121)에 아우 수성이 탈환했으나 산상왕때(198)에 발기의 난으로 다시 빼앗겼던 곳으로 고구려로서는 고토수복의 핵심지역이었다.
-311년 서안평을 점령하여 낙랑과 대방의 보급로를 차단
-313년 낙랑수복, 포로2천 획득. 낙랑군의 군벌 장통(張統)이 요동으로 퇴각하여 모용외에게 귀순함
-314년 대방점령, 병합

김탁 -우리역사바로알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한국상고사·민족사상 연구가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정책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 -Simple People In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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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낙랑 대방지역에서 할거하고 있던 자는 요동사람인 장통(張統)이었다. 미천왕이 낙랑과 대방을 공격하자 왕준(王遵)은 장통에게 낙랑의 1천여 가구를 데리고 선비족 모용외에게 귀부할 것을 종용하니 그대로 따랐다. 모용외는 새로이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이후의 요동정세는 모용씨 선비족과 고구려의 대결상황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 소위 한사군이라는 진번 임둔 현토 낙랑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그 가운데 소위 낙랑군을 두고 고구려와 한족국가간에 치열하게 쟁탈전이 벌어진 421년간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시대이면서 가장 왜곡이 심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지면 관계상 다루지 못한 낙랑군 재 평양설과 일제가 조작한 낙랑유물 출토에 대한 검토는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한사군에 댜한 연재는 아쉽지만 지면 관계상 여기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다음 연재부터는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독자 여러분들을 찾아 뵙고자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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