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기자의 눈] 세상 빛을 본 가야사, 발굴에 그치면 안 된다
    [시민기자의 눈] 세상 빛을 본 가야사, 발굴에 그치면 안 된다
    지난 4일 동방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 현장 공개…휴식 공간 및 관광지로 개발해야
    • 이기웅 시민기자
    • 승인 2018.12.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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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모닝충청 이기웅 시민기자] 영화 ‘명당’으로 또 다시 세간의 관심을 받았던 가야사지에서 내포지역 불교 역사와 문화 흔적에 대한 발굴 현장이 동방문화재연구원 등에 의해 4일 공개됐다.

    가야사는 백제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17세기까지 내포지역 화엄종의 법통을 계승해 온 내포지역 대표 거찰이었다. 

    고려시대를 정점으로 번영한 거찰이었음을 가야사 5층 금동보탑과 내포지역 유명 시인 묵객들의 문헌으로 알 수 있다.

    여기에 이날 발굴현장에서 소조불상과 용두 치미과 가야갑사 등 명문이 출토돼 흥선대원군이 이 터에 부친 묘를 쓴 중요성을 알 수 있게 됐다.

    고려시대 온돌, 담장 등 중요 유물 발견

    다소 부족하지만 가야사 창건은 단서가 될 만한 기록에 의해 추정할 수 있다.

    ‘광자대사 ‘윤다’(864~945), 진철국사 ‘이엄’(866∼932) 등이 가야산의 가야갑사에서 계를 받거나 수행했다‘고 적혀있다.

    이후 ‘1108년 묘응대선사(妙應大禪師) 교웅(敎雄)이 가야사와 백암사에서 주석하며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고 ‘나옹선사가 공민왕 7년(1358) 원나라에서 귀국, 가야사에 금탑을 세웠다’ 등 대대적으로 중창 불사가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도 있다.

    이 같은 기록을 볼 때 가야사의 창건 연대는 최소한 통일신라 이전으로 추정된다.

    가야사의 사역에 대한 발굴 조사는 2012년부터 총 5차례에 걸쳐 충남역사연구원에 의해 진행됐다. 이번에 동방문화재연구소는 이 뒤를 이은 것이다.

    1~5차 발굴조사는 남연군묘 앞쪽이 되는 사역을 동서로 나눠서 진행됐고 7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됐다.

    중요 유물은 8구의 소조불상과 창건 시의 사명(寺名)인 가야갑사(伽倻岬寺)를 의미하는 ‘4월 3일가량 갑사’(四月三日 伽倻岬寺), ‘가량갑’(加良岬) 등의 명문과 수막새, 암막새, 기와 편이 출토됐다.

    이번 6차 시굴조사는 금당지로 추정하는 남연군 묘역 뒤쪽의 사역을 중점적으로 지난 10월부터 발굴조사가 재개됐다.

    가야사의 금당지로 추정되는 사역에 대한 폭넓은 시굴조사를 통해 온전한 형태의 고려시대 온돌과 고려시대 담장, 건물지 기단 및 축대를 비롯해 건축물의 격을 나타내는 용두치 치문(鴟吻) 등이 출토됐다.

    또 통훈대부(通訓大夫, 조선시대 문신 정3품) 명분 등이 다량으로 발견됐다. 가야의 옛 사명인 ‘4월 3일’(四月三日), 가량갑(加良岬), 가량갑사(伽良岬寺) 등도 나왔다.

    이에 따라 가야사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금당은 17세기경에 알 수 없는 사유로 3회 이상 훼철(毁撤)되고 이후 기존의 부재를 활용해 구들을 설치‧난방한 흔적을 볼 수 있어 수행하던 공간이 주거용으로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밀 발굴을 통해 구전과 문헌으로 전해지던 가야사의 실증적 증거가 확인된 셈이다.

    최소 3회 당초 건물 초석이 재활용되는 과정을 이번 발굴로 알 수 있어 창건과 중창, 폐사 과정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가야사의 훼철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을 문헌을 통해 볼 수 있다.

    1674년 임방, 1706년 임징하, 1724년 한계진, 1754년 이철환 등 시인묵객들이 남긴 문헌과 유구 및 유물의 출토 양상으로 보아 17세기경 사세가 기울어 폐사했다, 주거시설로 중창을 거듭하며 19세기를 전후해서 최종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족한 연구 실정, 학계와 행정당국 관심 가져야

    내포지역의 불교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가야사는 수덕사와 보원사 보다 규모면에서 더 큰 절이었고 내포지역의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가야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가야산에 산재한 불교유적 규모와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폐사지 유적을 보존‧활용할 수 있도록 충남도 차원에서 전수조사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가야사를 연구하는 민간 모임인 ‘가야산 역사문화연구회’가 10여 년 간 문헌과 가야산 일대의 폐사지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보원사지와 가야사지를 제외한 가야사 주변에는 유구와 유물이 있음에도 안내판도 없이 방치됐다. 여기에 사유지로 접근조차도 어려운 실정이다.

    학계와 행정당국이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가야산 역사문화연구회는 “가야사를 중심으로 가야산에는 100여 개소 이상의 암자가 있었다”며, “전국 각지에서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데 조사 및 정비가 잘 이뤄져 유적을 야외전시해 불교문화 명소가 될 것이다. 또 시민들이 쉬고 갈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활용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설명회에 참석한 황선봉 예산군수는 “소문으로만 듣던 가야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연차별로 발굴을 할 예정”이라며 “중요한 유물이 출토되면 박물관 건립도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강열 학예사 역시 “가야사지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지만 정작 볼거리가 없어 아쉬웠다”며 “이번 발굴조사 결과와 기존 성과를 바탕으로 가야사지에서 출토되는 문화 유적 중 석조 유적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이를 야외에 전시해 역사교육시설과 체험, 주민들의 여간 공간으로 조성해야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발굴에 참여했던 동방문화재연구원 이상복 부장은 “이번 조사는 가야산 지역의 불교문화를 이해하고 내포지역의 불교문화를 조명하는 중요한 조사”라며 “가야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산 지역의 불교 고대문화를 밝혀내는 데 힘써 나갈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미래를 보는 창 가야사, 풀어야할 숙제 많다

    천년의 가야사 흔적을 찾는 발굴 작업은 2012년부터 한창이다.

    땅 위에 역사는 흘러가고 땅 밑에는 생생한 가야산의 역사가 잠자고 있어 현재의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가야사지는 단순히 절터가 아니 고대인들의 삶과 철학을 통해 가야산의 오늘과 미래를 볼 수 있는 창이기도 하다.

    이날 발굴조사가 이뤄진 곳은 1674년 임방, 1706년 임징하 등이 찾았던 가야사 이야기, 1724년 한계진 등이 봤다던 가야사의 금탑(金塔)과 그 뒤에 있었던 금당(金堂)이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시인묵객들의 글 속에서만 남겨진 가야사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발굴을 통해 답이 있을 듯하다.

    가야사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금당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최근까지도 전혀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가야사는 오층 석탑이 있던 곳이 사역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하겠다.

    가야사는 17세기 알 수 없는 이유로 폐사하고 그 주변에 있는 암자들은 1846년(헌종 12년) 흥선 대원군에 의해 가야산 내(상가리 일원) 모든 전각은 불태워지고 남연군의 묘가 조성됐다.

    이기웅 시민기자
    이기웅 시민기자

    이에 따라 탑 자리를 비롯한 사역은 훼손됐지만 다행히 땅 속 깊은 곳에 숨겨진 흔적은 고스란히 담겨 있어 가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게 분명하다.

    문헌으로만 전해지는 77개의 운제(돌계단雲梯) 그 뒤의 티베트 양식의 독특한 5층 석탑(금동보탑) 금당 사이에 있었다는 광명대와 거대한 주상, 통일신라~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상가리 귀부의 석비 등 땅속에 숨어버린 유적의 민낯을 발굴을 통해 찾고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다.

    가야사지는 단순히 절터가 아니 고대인들의 삶과 철학을 통해 가야산의 오늘과 미래를 볼 수 있는 창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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