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 김형규 자전거여행가] 잡초가 무성한 구릉지대를 한 시간이나 샅샅이 뒤졌으나 사금파리 한 조각 찾을 수 없었다.
내비게이션에 제주시 조천읍 와산리 464번지를 입력하고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정확한 지점을 잡지 못한 것이다.
4.3사건 유적지 아카이브에는 ‘종남마을’ 위치를 ‘464번지 일대’라고 뭉뚱그려 소개했다. 좌표도 병기했지만 일반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다. 포기하고 되돌아갈까 하다가 차 한 대 겨우 진입할만한 오솔길로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300m쯤 진입했을까 정면에 ‘T’자로 갈라지는 콘크리트길 모퉁이에 표지석이 눈에 잡혔다.
‘찾았다.’
종남마을 터는 수풀로 뒤덮여 흔적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다. 마을이 사라진 지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더라도 방문객을 위해 최소한의 관리정도는 해줘야하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4.3유적지 안내판은 잡목 뒤에 가려져 있다. 모퉁이에 ‘와산리 종남밭’이라는 표지석이 없다면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내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종남마을은 와산 본동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진 당오름 정상 뒤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4․3 사건 당시 10여호에 약 50명의 주민이 밭을 일구고 가축을 기르며 살았다.
종남마을은 1948년 11월 20일 초토화작전으로 불탄 이후 영영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이곳에서 1㎞ 떨어진 제비동(제비보리)마을 8가구도 불에 타 사라졌다.
4.3사건 당시 제주 전역에서 전소된 가옥은 3만여 채에 이른다. 4.3사건이 종결된 이후에도 인기척이 끊긴 ‘잃어버린 마을’은 종남마을, 곤흘마을, 다랑쉬마을 등 100곳에 이른다. 대부분 중산간 마을이다.
중산간마을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은 건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해안선으로부터 5㎞이상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모두 폭도배로 간주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면서 부터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져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해촌으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에는 계엄령이 선포돼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삼진작전(三盡作戰)’이 전개됐다. 이 과정에서 중산간마을 95%가 불에 탔다. 생활터전을 잃은 주민 2만 여 명은 살기 위해 한라산 깊은 곳으로 도피했다.
4.3 사건의 음습한 현장을 둘러보면서 수많은 원혼의 울부짖음이 귓전에 울리는 듯한 환영에 빠졌다. 무거운 마음을 그나마 달래준 것은 제주도 중산간의 아기자기한 자연풍광과 부락의 토속미였다. 잘 정돈된 이국적 관광휴양지 이면에 신비로이 감춰진 제주도만의 시골풍경을 대면하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제주시에서 20㎞쯤 떨어진 선흘리 ‘불카분낭’ 탐방은 보물을 간직한 오지마을을 남몰래 찾아가는 짜릿함을 안겨줬다. ‘불카분낭’은 ‘불에 탄 나무’라는 뜻이다.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이 불타면서 마을 안쪽 팽나무도 함께 불에 탔다. 죽은 줄 알았던 팽나무는 몇 년이 지나 새살이 나고 새싹이 돋았다. 화마에 죽은 굽이에서는 어디선가 날아온 다른 나무의 씨가 싹을 틔웠다.
오후 5시쯤 선흘리로 가는 왕복 2차선 ‘북선로’는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았다. 일주도로에서 중산간 방면으로 꺾어 들어가는 제주도의 대다수 도로는 북선로처럼 차도라기보다는 산책로 같았다.
연인들이 도로 한가운데서 손을 맞잡고 한가로이 거니는 풍경을 쉽게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의 수채화 같은 산보를 자동차가 방해하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
불카분낭 마을 진입로와 안길은 비좁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형성된 자연부락이다. 이곳을 방문하려면 차량을 마을밖에 주차하고 도보로 이동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계속>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김형규
자전거여행가이다. 지난해 아들과 스페인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를 다녀왔다. 이전에는 일본 후쿠오카-기타큐슈를 자전거로 왕복했다. 대전에서 땅끝마을까지 1박2일 라이딩을 하는 등 국내 여러 지역을 자전거로 투어하면서 역사문화여행기를 쓰고 있다.
▲280랠리 완주(2009년) ▲메리다컵 MTB마라톤 완주(2009, 2011, 2012년) ▲영남알프스랠리 완주(2010년) ▲박달재랠리 완주(2011년) ▲300랠리 완주(2012년) ▲백두대간 그란폰도 완주(2013년) ▲전 대전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