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한·중 동방문자의 기원은 배달민족이다
[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한·중 동방문자의 기원은 배달민족이다
창힐문자와 신지문자에 대한 고찰 ①
  • 김탁
  • 승인 2018.12.29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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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족이 동방문자의 시조로 추앙하는 “창힐蒼詰”은 동방사람 “파란치”라는 뜻이다 

동방문자의 시작
중국 고대문헌에 문자의 시조는 창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창힐은 새 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만들었다. 정말로 새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는지는 불분명하나 글자형태로 보아서 한자처럼 획수가 많고 네모난 형태도 아니고 새 발자국처럼 간결한 형태로 되어 있기때문에 붙여진 명칭인것 같다.

창힐문자는 28자가 전해온다. 중국 섬서성 백수현 사관향史官鄕에 있는 창성묘蒼聖廟라는 창힐을 기리는 사당에 세운 창힐조적서비蒼詰鳥跡書碑와 서안시 비숲(碑林)에 있는 창힐글자비에 있다고 한다. 또한 10세기말 중국 송나라(960-1278)태조 순화3년(992)에 간행된 옛 글씨체인 <순화각첩淳化閣帖>에 28자가 전해 온다고 한다.

이에 비해서 “신지글자”는 16자가 전해온다. 신지글자에 대해서는 <평양지><영변지><해동죽지><해동역대명가필보>에 전해오고 있는만큼 근거는 명확하다. 또한 평안북도 용산군 신암리, 중국 요령성 여대시 백람자 윤가촌을 비롯한 무덤에서 나온 유물을 통하여 의심할 여지없이 확인되고 있다. ‘신지’는 순 우리말 ‘신치’의 한문식 표기이다. 神市(삼국유사 권1), 神誌(삼국유사 권2), 臣智(후한서 동이전), 臣芝(진서 동이전)등으로 기록하며 그 뜻풀이는 대자大者(삼국지 위지 동이전), 즉 큰사람으로 풀이했다. “치”는 사람을 나타내는 우리말로서 “신치”는 종족집단의 통치자나 지배자를 의미한다. 이치, 저치, 장사치, 벼슬아치 등에 용례가 남아있다.

따라서 신지글자라는 말은 통치자가 만든 문자라는 뜻이다.

창힐 새발자욱 글자 28자나 신지글자 16자는 글자의 모양새로 보아 한갈래의 글자임을 한눈에 알아볼수 있다. 오늘날 한자와도 글꼴이 전혀 다르다. 만약에 한자의 전단계 문자라고 한다면 진시황 천하통일기에 문자통일 사업을 추진한 대학자인 이사李斯는 물론 많은 학자들이 창힐문자 28자를 해독할려고 노력했으나 끝끝내 해독하지 못했을 이유가 없다. 이사는 고작 8자를 해독하였다고 하면서 “하늘이 분부를 내려 황제가 왕을 갈다”라는 황당한 해독을 남겼음은 한자와는 전혀 계통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창힐은 황제의 사관이라고 왜곡했다.
창힐글자가 우리말이라는 것은 ‘신지’가 우리말이듯이 창힐 역시 우리말의 한문식 표현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창힐이란 이름은 “푸른 동방나라 사람”이라는 뜻이다. 창蒼은 푸를창으로 푸른, 파라의 옛 말인 부루, 바라에 대한 뜻 옮김이고 힐詰은 우리말 사람을 가르키는 ‘이치, 저치’라는 말에서 ‘치’의 옛 말인 ‘기, 히, 시’에 대한 소리 옮김으로 되어 창힐은 ‘부루기/부루히/부루시’의 뜻소리 옮김이다. 다시말해서 창힐은 동방 밝달족, 조선사람이라는 명확한 성명상의 확증이라고 할수 있다.

중국인들은 창힐을 사황史皇, 창성蒼聖이라고 존칭한다. 고대 인물에 皇, 聖, 神이라는 존칭격이 붙는 인물은 극소수이다. 그럼에도 황제의 신하이면서 사관이라고 했다. 이 말은 황제시대에 창힐문자가 만들어 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동시에 창힐의 공적을 그들이 조상으로 추앙하는 황제의 업적으로 둔갑시키기 위해서 황제의 신하라고 조작한 것이 분명하다.

<포박자>라는 신선계통의 문헌에 “황제는 동쪽으로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면서 자부선생을 뵙고 삼황내문을 받았다 黃帝東到靑丘過風山見紫府先生受三皇內文…”는 기록이 있다. 동쪽으로 청구에 이르렀다고 한것은 청구는 동방사람들이 사는 곳임을 말한다. 풍산은 동방족 복희의 터전이고 자부紫府라는 것은 붉은 관부라는 뜻으로 밝달, 배달의 ‘밝, 붉’을 붉은 자줏빛 ‘자紫’字로 표현했다. 황제는 밝달민족의 서울, 중심지인 자부紫府에 와서 삼황내문이라고 하는 밝달민족의 고유경전을 받아갔다는 뜻이다.

창힐은 황제와 나란히 고대 동방족 집단의 우두머리임은 다음과 같은 우리 기록으로 증명이 된다.

“한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가 있었고 동쪽에는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에는 황제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않되었으니 이는 두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이었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찌기 간지의 술(干支之術)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글(符圖之文)을 배웠다.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삼성기전 하편>

*주, 부도의 글자는 부호와 그림으로 된 화상畵象글자이다. 뜻 글자인 한자의 모체가 됨

지나 고대사의 개창자 복희는 동방인
중국 3황5제의 첫머리에 오는 복희伏犧 역시 파란치, 푸른치라는 동방족을 한문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복희는 포희包犧라고도 하며 복伏(pok)이나 포包(pou, bau)로 시작하는 서로 다른 여덟, 아홉가지의 한문식 표기가 있는바 이러한 현상은 지나족이 아닌 동방족의 호칭을 지나인들이 각자 다른 한문으로 표기하다가 보니 나타난 현상이다. 예를 들면 伏羲, 伏戱, 伏犧, 包犧, 불화火변에 包犧, 疱犧 등이 있다.

복희의 성姓은 바람풍風이요 이름은 방아方牙, 창아蒼牙라고 한다. 바람풍, 방아, 창아는 모두 바라(바람), 푸른, 파라를 어간으로 하는 우리말의 한문식 표현이다. 창蒼의 우리말은 푸를창이다.

창힐이나 복희라는 인물명칭 뿐만 아니라 동방 혹은 동방사람을 지칭하는 청구靑丘는 동방을 의미하는 푸른 언덕, 파란 터를 의역한 것이다. 복희 역시 여덟가지 '괘'를 만들었고 고대의 매듭글자(결승문자)를 대신하는 서계書契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지나 고대사에 등장하는 복희, 창힐, 황제라는 군장들은 모두 동방사람으로서 이렇게 문자의 창시자로서 서로 얽혀 있다. 팔괘는 문자 발생 이전의 부호적인 단계이며 서계는 초기 문자단계에 들어 섰음을 가르킨다.

삼황내문은 고대 동방의 선경仙經

신채호나 이능화는 삼황내문을 "진단백민국震檀白民國의 특유한 선경仙經"이라고 못 박았다. 이맥선생은 태백일사 마한세가와 소도경전본훈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때에 자부선생께서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을 천폐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셨다. 삼청궁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 헌원, 창힐, 대요의 무리가 모두와 여기서 배웠다” <마한세가>

“천부경은 천제 환국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이니 환웅대성존께서 하늘에서 내려 온 뒤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서 이를 기록케하였다. 최고운 치원은 역시 일찌기 신지의 전문篆文을 옛 비석에서 보고 이를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소도경전본훈>

“<삼황내문경>은 자부선생이 헌원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마음을 씻고 의義(옳음)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찌기 삼청궁에 사셨으니 궁전은 청구국 대풍산大風山의 남쪽에 있었다. 헌원이 몸소 치우를 배알 했는데 가는 길에 명화名華를 거치게 되어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경문은 신시神市의 녹서鹿書(녹도문, 즉 사슴 발자욱 모양을 보고 만든 고대글자))로 기록되어 세 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

<삼황내문경>은 “신시神市의 녹서鹿書” 즉 녹도문으로 기록되었다고 했다. 당시에 창힐은 동방족 제후이었으니 녹도문이나 녹도문을 개량한 문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 녹도문을 새발자욱글자라고 명명했을 수도 있다. 지금 전해오는 창힐문자 28자. 신지글자 16자는 이러한 밝달민족의 고유사상을 간결하게 표현한 글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81자로 이루어진 천부경의 핵심내용이 28자, 16자에 담겨 있을 수도 있다. 고대인들이 기록으로 남겨둘 정도의 중요한 내용이라면 밝달민족의 핵심사상인 밝음 숭배, 즉, 경천사상, 천지인 사상을 담아냈을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수 있다. <2부로 계속 이어집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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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철 2019-06-27 09:14:14
우리나라 대다수의 백성들이 역사 왜곡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늘 정치적 논리에 빠져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 식민통치의 잔재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기자님의 올곧은 역사의식이 하루빨리 온 누리에 전달되어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성장하여 나아가 고토수복의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랄뿐입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널리 전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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