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인문학 서재] 그림, 보는 게 아니라... 읽고 대화하는 것
[임영호의 인문학 서재] 그림, 보는 게 아니라... 읽고 대화하는 것
(34) 오주석 ‘한국미 특강’
  •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 승인 2019.01.0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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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미술사가 오주석(1956~2005)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젊은 나이에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미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이것을 국민에게 가장 잘 이해시켜 한국 전통미술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입니다. 그가 쓴 책 중에서 《한국미 특강》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처럼 역사 속 사건을 기록한 것만이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림도 말을 합니다.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야기일 수도, 그림 속 주인공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현재에 사는 우리의 고민과 맞닿을 수 있습니다. 화가 개인의 생각에서 탄생한 꽃이나 그림조차도 개인과 시대의 아픔과 정신을 두루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림 공부는 인생 공부이고 역사 공부입니다.

먼저 오주석은 우리에게 감상을 하는 바른 자세를 권합니다. 감상 자체를 ‘영혼의 떨림으로 느끼는 행위’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음 비우고 옛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사람의 마음으로 느끼라고 합니다. 회화를 보는 거리도 회화 작품 크기의 대각선을 그었을 때, 대략 그 대각선 길이의 1에서 1.5배 거리에서 떨어져 천천히 보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림의 크기로 거리를 맞추는 것입니다. 시선도 우상(右上)에서 좌하(左下)로 갑니다. 그래서 안내판으로 전시장 입구부터 동선을 좌로 꺾어서 가게 합니다.

저자는 약 20년 전 호암미술관에서 조선백자전(朝鮮白磁展)을 했을 때 일화를 소개합니다. 임금희씨 병(甁)이라는 아름다운 백자병(白磁甁)을 앞에 두고 거의 30분이 되도록 빙빙 돌면서 영 떠나지 못하는 한 중년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전시장  문을 떠났다가 아쉬워 다시 전시장문으로 돌아와 이 작품을 한참이나 더 살펴보고 갔다고 합니다. 저자는 참 멋있고 아름다운 모습이라며 칭찬합니다. 아름다운 이성을 보았을 때처럼 왠지 마음이 끌리는 작품을 느긋하게 천천히 마음을 집중해서 감상하는 것입니다. 일본인 교수로 중국 그림을 전공한 한 분이 일본 천리대(天理大) 대학도서관에 소장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보관상 문제로 보여주지 않자 우리나라에 전시되었을 때 와서 좋은 표정 싫은 표정 다 지으면서 꼬박 5시간을 제자리에서 서 있었다고 합니다.

예술작품은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마음을 기울여 천천히 대하는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속내를 내보입니다. 그림을 감상할 때는 l see the painting 이 아닙니다. l look at painting 이라 씁니다. 그저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세부를 찬찬히 뜯어보는 것입니다. 무슨 특별한 학식이나 교양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조선 말기 제물포 수호조약을 체결한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글에서 그의 부인이 김홍도의 병풍을 실감 나게 감상한 나머지 마치 그림 속 인물들이 그림에서 뛰쳐나와 살아서 움직이며 소리 내는 것 같았다고 술회합니다. 사실적인 풍속화를 제대로 마음으로 본 것입니다. 김홍도의 《씨름》이라는 풍속화를 보면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있습니다. 조금 숨죽이고 들여다보면 마치 자기가 지금 그 씨름판 한가운데서 구경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얼굴 표정을 보세요. 자기도 모르게 풍악에 신명 나 몸이 달아오릅니다.

우리나라 전통문화는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에서 나왔습니다. 음양오행은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서 관통한 사상입니다. 하나의 철학이기보다는 우주와 인생을 바라보는 일종의 사유의 틀입니다. 서울은 한강 북쪽에 있는 도시로 양(陽)입니다. 그래서 한양(漢陽)으로 한 것입니다. 물론 강남은 한음(漢陰)입니다. 동대문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한 것은 봄의 계절이 오면 만물이 파릇파릇 새싹이 나고 자라기에 봄이 어질다는 덕을 가졌다고 보고, 어진 덕을 일으킨다는 뜻을 가집니다. 여름은 무성하게 만물이 자라지만, 정연한 질서를 이루고 함부로 나대질 않고 분수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禮)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높이는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했습니다. 가을은 찬바람 불어 잡초를 죽이고, 과일을 익게 하는 계절이라 의롭게 분별한다 하여 가을에 해당하는 서쪽 문을 의(義)를 돈독하게 한다는 돈의문(敦義門)이라 불렀습니다. 겨울이 되면 춥고 땅 위의 것조차 밑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참 슬기로운 지혜라 하여 엄숙할 숙(肅)에다 알 지(知)의 숙지문(肅知門) 아니면,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숙정문(肅靖門)으로 부릅니다. 이와 같이 동서남북 4대문의 이름을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에 따라지었습니다.

오행에 맞추어 소리를 따져보면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가 되고, 색깔로 따져보면 동은 파랑, 남은 빨강, 서는 하양, 북은 검정, 중앙은 황색입니다. 동물로는 동은 청룡, 서쪽은 백호가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전통문화의 모든 체계는 전부 음양오행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엽전 모양도 음양오행과 관련 있습니다. 엽전의 겉은 둥글고 속은 네모지게 생겼습니다. 둥그런 것은 주역의 64괘를 원형으로 배열했을 때 하늘의 모습이고, 정사각형으로 늘어놓은 것은 땅을 상징합니다. 조선시대 국왕의 용상 뒤에 치는 병풍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는 궁중회화를 대표하는 그림입니다. 해와 달은 음양으로 왕과 왕비를 뜻하고, 다섯 봉우리는 오행으로 하늘과 산, 바다와 숲과 같은 자연세계를 뜻합니다.

한국인들은 대충대충 일한다는 말은 일제가 꾸민 식민사관입니다. 날조된 사관입니다. 2000년 전에 만든 잔줄 무늬 청동거울은 무려 13,300개나 되는 직선과 동심원을 직경 21.2cm의 원 속에 0.3mm 짜리 가는 선을 그려 넣었습니다. 현미경을 대놓고 보아야 보일 정도입니다.

단원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는 소나무 아래 호랑이란 뜻입니다. 이 그림은 1m도 안 되는 작은 그림이지만, 호랑이의 기세가 화폭에 충만합니다. 호랑이 머리 부분을 확대해서 보면 은밀한 생태까지 남김없이 그려 무척이나 자세합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활략한 김은호(金殷鎬,1892~1979) 화백의 호랑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는 해부학적 정확성 없이 고양이처럼 귀엽게 그렸습니다. 호랑이 다운 기백이 없습니다. 일본식 화풍입니다. 우리나라 민화(民畵) 보다 못합니다. 민화는 순수하고 발랄한 율동감이 넘치는 기운이 보입니다.

그런데 송하맹호도의 표구가 안타깝게도 일본식입니다. 일본은 표구 무늬가 시끌벅적합니다. 그림이 요란한 표구에 갇히어 있습니다. 우리처럼 은은하거나 점잖은 것이 아니라 금가루 은가루 뿌리고 오만가지 원색으로 야하게 합니다. 일본사람들 표구실력은 참 좋습니다. 다시 하려면 그림이 상해서 어쩔 수없이 그냥 둘 수밖에 없습니다.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조선시대 그림은 욕심이 없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꾸밈없이 덤덤한 매무새입니다. 그렇지만 붓은 끊어져도 뜻은 완벽하게 이어집니다. 풍속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확대해 놓고 보면 그대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 작고 섬세한 그림 속에서도 화가의 정확한 붓끝이 어떻게 움직여 나갔는가를 분명하게 살필 수 있습니다. 섬세한 이야기꾼인 저자가 몇몇 그림을 감상해줍니다. 옛 그림 속 주인공 나이와 의도를 파악하고 그림 한쪽에 쓴 글씨를 보고 그것을 다시 부연 설명합니다. 김홍도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에서 노인이 있고, 그 앞에 동자가 있고, 중간에 조촐한 술상이 있고, 노인은 하염없이 꽃나무가 있는 언덕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취해있는 물 아래에서 위로 고개를 비스듬하게 들어 쳐다봅니다.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에서 선비는 고개를 쳐들고 봄비에 속옷 젖는 줄도 모르고 꾀꼬리 소리에 넋이 빠져 있습니다. 각진 옷으로 그 집안 주인의 정성을 보고, 잔가지는 버드나무 잎 새만 그린 것으로 술기운이 흥건한 주인공의 마음을 읽습니다. 단원은 한국 사람의 생태를 구수한 눈으로 바라보고 일상적인 삶의 즐거움을 고무적으로 표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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