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낙론학파 대표적 인물이자 산림(山林)의 사표
[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낙론학파 대표적 인물이자 산림(山林)의 사표
(21)대전의 인물-송명흠(宋明欽)
  • 자료협조=대전평생교육진흥원
  • 승인 2019.01.0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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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송명흠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회가(晦可), 호는 늑천(櫟泉)이다. 그는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증손이며 군수인 요좌(堯佐)의 아들로 1705년(숙종31) 을유 10월 21일에 한양 제생동(濟生洞)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은진이다. 도암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21년(경종1) 신축에 일어난 사화로 폐해를 입어 낙향하는 아버지 묵옹공(默翁公)을 따라 옥천(沃川) 도곡(塗谷)·송촌(宋村) 등지로 거처를 옮겨다니며 살았다.

1739년(영조15) 학행으로 천거되어 여러 벼슬이 제수된 후, 충청도사·사헌부 지평·장령·군자감정 등을 지냈다. 1754년(영조30) 특별히 서연관을 제수하여 별유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1755년(영조31) 옥과현감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3년 상을 마친 뒤 집의·승지·참의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모두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760년(영조36)에 예조참의에 발탁되어 이듬해 봄에 동부승지로 제수되었다.

1764년(영조40)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정치 문제를 논하다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만년에 고향인 회덕으로 내려온 그는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기 위하여 이재·민우수(閔遇洙)·송사능(宋士能)·김양행(金亮行)·신소(申韶) 등과 서신으로 학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768년(영조44) 63세의 나이에 생을 마쳤다. 사후에 복관(復官)되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묘는 연기군 동면 부강에 있다. 유고로 ‘늑천집(櫟泉集)’ 10책이 전한다. 후에 함양군(咸陽郡) 안의(安義) 성천서원(星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사도세자 사건과 송명흠
조선 시대 문신이자 학자인 송명흠은 평소 벼슬에 뜻이 없어 왕의 부름에도 사양하고 있다가, 마지 못해 등청하여 사도세자의 스승(시강원 찬선)을 맡고 있었다. 때마침 사도세자 사건이 일어났다. 왕은 세자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관례에 따라 대신들과 이름난 학자들을 모아 이 문제를 상의하였으나, 왕의 뜻이 이미 결정된 것을 눈치 챈 사람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송명흠이 혼자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폭군으로 만대의 지탄을 받고 있는
제왕들도 ‘중국의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에 비유’ 자식을 죽이는 악행만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어찌 전하께서 그 선례를 남기려고 하십니까?” 영조는 이 말을 듣고 격노해서 송명흠을 내쫓았다.
그리고는 선전관에게 칼을 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송명흠의 뒤를 밟다가, 그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어느 집에 들르거든 그와 그 집 주인의 목을 베어 오너라. 만일 곧장 집으로 가거든 따라 들어가 왕명으로 형을 집행하러 왔다고 말해라. 그래서 그가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형을 받으려고 하거든 살려주고, 조금이라도 변명을 늘어 놓거든 목을베어 오너라.”
영조는 송명흠이 어느 당파의 사주를 받고 있지 않나 의심을 한 것이다. 집에 도착한 송명흠은 죽음을 각오하고 기다리는데, 선전관이 도착하여 “왕명을 받으라” 하니 송명흠은 말없이 순순히 이에 응했다. 선전관이 칼을 거두며 왕의 뜻을 이야기하니, 송명흠이 차갑게 말했다. “그것은 왕이 신하를 농락하는 것입니다. 한번 떨어진 왕명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어서 내 목을 쳐 왕명을 바르게 하십시오. 예로부터 아무리 군왕이라고 신하를농락해서는 안되며 왕명은 중대하므로 한번 떨어지면 돌이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결과가 둘로 나타나는 명령은 있을수 없으니 내 목을 쳐 왕명을 바르게 하십시요” 선전관은 그 자리를 빠져나와 영조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영조는 “송가라는 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선비중의 선비로구나” 하면서 너털 웃음을 웃었다고 한다. 송명흠은 동춘당(송준길)의 현손이며 정조때에 문원공 시호를 받았고 불천지위와 사파지지의 영예를 얻었다.
숙종때 인현왕후는 동춘당의 외손녀이며 고종때 조대비는 늑천(송명흠)의 외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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