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도학과 의리정신 실천한 행동파 학자
[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도학과 의리정신 실천한 행동파 학자
(22)대전의 인물-송병선(宋秉璿)
  • 자료협조=대전평생교육진흥원
  • 승인 2019.01.18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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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 선생
송병선 선생

평생 도학과 의리정신을 실천하다.

•생몰연대 : 1836년(헌종2)∼1905년(광무9)
•생 가 :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
•배 향 : 문충사(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
•묘 소 :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전중리

생애
송병선은 조선 말기 학자이며, 순국지사이다. 그는 혼란의 시기에 태어나 조선의 봉건 질서의 붕괴와 외세의 침략을 목격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행동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송시열의 9대 손으로 동구 성남동에서 태어나 1905년(고종42) 12월 30일 순절하기까지 성남동 석남촌(石南村) 구제(舊第)에서 살았다.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본관은 은진이다. 송병선은 송시열(宋時烈)의 도학과 의리 정신의 가통과 학통을 철저히 계승하였다. 어릴 적 동생 병순과 함께 백부 송달수(宋達洙)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스승인 달수가 죽은 뒤 가학(家學)이 기울어질 것을 염려하여 더욱 학문에 매진하였다. 종백부(從伯父) 송근수(近洙)와 외조부의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1877년(고종14)부터 태릉참봉·경연관·서연관·시강원 자의 등을 시작으로 1903년까지 총 23차례에 걸쳐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880년(고종17)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의 복상은 마땅히 소공시마복(小功緦痲服)이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1883년(고종20)과 1884년(고종21)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만 1884년 의제변개(依制變改)✽에 대해 온 힘을 다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두문불출하면서 심신수련에 정진하였다. 1885년 무주 구천동 산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 강론에만 몰두하였다.

1905년(대한제국 광무9) 11월 일제가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미명 아래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맺은 늑약으로 국권을 박탈하였다. 이에 분개한 송병선은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늑약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과 현량(賢良)을 등용하여 각 부에 임용할 것, 기강을 세워 명분을 바로 잡을 것,

재정을 정비하여 국력을 배양할 것, 학문을 바로 잡아 인재를 기를 것, 군사력을 배양하여 비상시에 대비할 것 등의「10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그는 계속해서 을사늑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속아 일본 헌병대에 납치되어 강제로 고향으로 호송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였다.

1905년 음력 12월 30일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 것에 대해 분통해 하면서 황제와 국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놓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그는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강제조약) 폐기,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고, ‘도(道)의 수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송병선의 자정순국(自靖殉國) 절의정신은 유학사상의 근원이 되어온 춘추대의 정신(春秋大義精神)과 송시열의 도학정신(道學精神)을 철저히 계승하고 국가와 민족의 자주성과 자존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는 애국의 실천이었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侍婢)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였다. 세간에서는 그를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동생 송병순(宋秉珣, 1839~1912) 역시 순국한 형 병선을 좇아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활동에 힘쓰다가 1912년 3월 22일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이처럼 송병선의 한말애국운동은 동생뿐만 아니라 노응규, 안규용 등에게 계승되어 대전 지역의 근대구국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송병선이 순국한 후 그에게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의정대신에 추증하였다. 1914년에는 왕명으로 충북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동생과 함께 배향하였으며, 1965년에 보문산으로 옮겨졌다가 1966년 대전시 용운동 용동서원(龍洞書院), 곧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두 형제분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 대전 문충사는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병선은 독립운동활동을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송병순에게도 1977년 건국훈장이 수여되었다. 그의 위대한 충의 정신은 오늘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저서로는 41세에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송시열 등 오현(五賢)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추려서 1876년(고종13)에 주자가 엮은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로 편찬한 『근사속록(近思續錄)』이 있다. 그 밖에 『무계만집(武溪謾輯)』, 『동유연원록(東儒淵源錄)』, 『동감강목(東鑑綱目)』이 있으며 문집으로 『연재집(淵齋集』이 간행되었다.

2015년 4월 3일, 송병선의 증손자인 송영문(73·대전시 동구 용운동)씨가 대를 이어 보관하고 있던 송병선 초상화를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대전시에 기증 하였다. 묘소는 전북 옥구군 임피면 전중리(沃溝郡 臨陂面 田中里)이다. 향배하는 사당은 대전시 동구 용운동(龍雲洞)의 문충사(文忠祠)와 경남 거창군 주상면 연교리의 성암사(聖巖祠), 광주시 북구 일곡동의 만주사(晩洲祠), 전북 남원시 주천면의 경양사(景陽祠) 등이다.

사상
그는 송시열의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의리정신(義理精神)을 계승하여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송시열로부터 시작하여 권상하(權尙夏)와 한원진(韓元震)을 거쳐 송능상(宋能相)·송환기(宋煥箕)·송치규(宋穉圭)·송달수(宋達洙)·송근수(宋近洙)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전수받았다. 그는 9세 때부터 백부 송달수에게 『소학(小學)』을 배우고, 또 숙부 송근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송달수는 조선후기 유학의 주요 쟁점이었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 탈피하여 학자들이 스스로 본연의 이치를 연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송근수는 1882년에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교섭에 반대하여 사직소를 올렸으며,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발표되자 전통적 질서를 함부로 바꿀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 위정척사(衛正斥邪) 정신을 실현한 인물이다. 여기서 본다면 송병선은 순수 학문적 자세와 척사적 성향의 사승(師承) 관계를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1865년 5월에 만동묘(萬東廟)가 철폐되자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의 간행작업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만동묘 철폐에 따라 의리의식이 쇠퇴할 것을 염려하여 송시열의 의리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어 그는 공자의 『춘추(春秋)』와 주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본받아 우리나라의 역사를 정리하여 『동감강목(東鑑綱目)』이라는 사서를 엮었다. 이는 외세에 굴하지 않는 민족자존의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편찬한 것으로 풀이된다.

1876년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이 조약이야 말로 조선을 멸망시키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 하면서 일본을 척사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위정척사를 행동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론을 규합하는 한편, 조정에 상황을 타결해나갈 길을 제시하였다.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자 우선 동지들을 규합하고 사상적 무장을 확대하고자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그가 선택한 방법론은 유림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조선을 사상적으로 지탱해 온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전파하고,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면서 진취적인 기상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그 결과 충청, 호남, 영남에서 143명의 사우들과 1,100여 명의 문인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 그는 1877년부터 태릉참봉(泰陵參奉)과 서연관(書筵官)·경연관(經筵官) 등을 시작으로 1903년까지 총 23차례에 걸쳐 관직에 천거되었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출사하지 않고 재야에서 도(道)를 지킴으로써 국가질서를 회복하고 외세에 항거하고자 하였다. 그는 여러 번의 상소를 통하여 어진 인재 등용, 군사력 배양, 국기기강 확립, 일본세력 척결 등을 건의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곧바로 조약을 파기하고 5적을 처단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기 위해 외교를 통하여 조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문인 정기연·이병운 등과 함께 고종 황제를 직접 대면하러 갔다. 여기서 그는 망국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0가지의 시책을 제시하였다. 모든 적(賊)을 참(斬)하여 왕법을 바로잡을 것, 현자(賢者)를 등용하여 각부에 임용할 것, 의(義)로써 각국 공사관에 변론할 것, 기강을 세워 명분을 바로잡을 것, 군력을 배양하여 비상시에 대비할 것 등이다. 그러나 이때는 일제가 이미강대국들로부터 조선의 강점을 용인받은 상태여서 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송병선은 송시열의 의리정신을 계승하여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죽음으로써 항거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론이 아닌 현실 속에서 학문을 의연히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는 망해가는 나라에도 인물이 있음을 보여준 절의의 유학자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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