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민족사관 수립, 국민의식 일깨운 독립운동가
[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민족사관 수립, 국민의식 일깨운 독립운동가
(23)대전의 인물-신채호(申采浩)
  • 자료협조=대전평생교육진흥원
  • 승인 2019.01.2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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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관 수립으로 국민의 의식을 일깨우다.
독립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생몰연대 : 1880년(고종17)∼1936년
•생 가 :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생애
신채호는 조선 말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사학자이며 언론인이자 문인이었다. 1880년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의 진외가(外家)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그의 아이 때의 이름은 ‘채호(寀浩)’였는데, 나중에 ‘채호(采浩)’로 개명하였다.

신채호는 8세가 되던 1887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충청북도 청원군(淸原郡) 낭성면(琅城面) 귀래리(歸來里:고두미)로 이사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그의 할아버지가 차린 사숙(私塾)에서 한학 교육을 받았다. 이후 13세에 이르러서는 사서삼경을독파하여 주위로부터 신동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1895년(16세)에 풍양조씨(豊壞趙氏)와 결혼하였으며 1898년(19세) 가을에는 전 학부대신이었던 양원(陽園)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 후 그는 1901년에는 향리 부근의 인차리(仁次里)에 있는 문동학원(文東學院)에서 강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02년에는 성균관에서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항일 성토문(抗日 聲討文)을 작성하고 친일파 이하영(李夏榮) 무리의 매국 음모를 규탄하였다. 19세에성균관에 입학했던 신채호는 26세가 되던 1905년 2월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이 해에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사(皇城新聞柱)의 논설위원에 위촉되어 계몽 논설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 그는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杜)의 주필로 취임하였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서호문답」, 「영웅과 세계」,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등 애국적 계몽논설과 사론을 집필하고 「독사신론」,「이순신전」, 「최도통전」 등 역사물을 연재하였다.

신채호는 1907년에는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하는 한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가담하였으며 애국적인 논설을 신문에 계속 연재하였다.

1910년에는 1908년 집필했던 『독사신론(讀史新論)』을 『국사사론(國史私論)』이란 제목으로 『소년(少年)』 제3권 8월호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해에 안창호·이갑(李甲) 등과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중국 산동반도의 청도(靑島)에 도착하여 다수의 동지들과 청도회의(靑島會識)를 개최하였으며,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海蔘戚]에 가서 이종호(李鍾浩)의 자금 지원을 받아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복간하기도 했다. 그 뒤에 그는 『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간하기도 했고, 1911년에는 권업회를 조직하여 현지에 있는 우리의 동포들을 위해 『권업신문(權業新聞)』을 창간하였다. 이 무렵 단재 신채호는 병고와 생활고로 인해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13년에는 신규식(申圭植)의 주선으로 북만(北滿)을 거쳐 상해로 갔다.

이듬해에 그는 봉천성(奉天省)의 회인현(懷仁縣)으로 가서 독립군 양성지와 사적지의 답사를 겸하여 백두산 등반에 이어 남·북만주 일대의 옛 고구려 땅을 떠돌며 광개토대왕릉을 현지 답사한 후 1915년에는 북경 도서관에서 『조선사(朝鮮史)』 집필을 준비하였다. 이 때 만주 일대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는 1915년 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며, 박은식·문일평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건립하여 중국에 있는 한국청년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무렵에 그는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의 계몽을 위한 동창학교(東唱學校) 교재로 『조선사(朝鮮史)』를 발간하였다. 다시 북경으로 돌아온 단재는 1918년에는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서『조선사』의 집필에 몰두하였다. 40세가 되던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 그 해 4월 신채호는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고 의정원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1923년 그는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열단선언서로 알려진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단재는 1925년 1월 3일에서 10월 16일까지 동아일보를 통해 「평양(平壤) 패수고(浿水考)」·「조선 고서의 1천년대 제 1대 사건」·「조선 고서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 등을 연재하였다. 그리고 그는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였고, 이해 9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東方連盟)에 가입하였다.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대만에서 외국위체를 위조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1928년 5월 8일 대만의 기륭항(基隆港)에 상륙하려다가 기륭수상서원(基隆水上署員)에게 붙잡혀 대련(大連)으로 호송되었으며, 2년 후인 1930년 4월 대련 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旅順監獄]에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2월 21일 57세의 일기로 뇌일혈로 옥중 순국하였다. 당시 그의 유해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암장되었으며 일제의 눈을 피해 묘비만 만해 한용운의 주선으로 신백우가 몰래 세웠다.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어려서부터 한학과 유학을 익혔던 단재 신채호는 유학자에서 머무르지 않고 일생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 운동가이며 우리나라의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틀을 세운 사학자인 동시에 언론인이었다. 1962년 3·1절에 대한민국 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는 단재 신채호의 생가가 복원되고 동상이 건립되었다.

단재의 한국 고대사 연구
“집안현의 유적을 한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

단재 신채호가 서간도 환인현에서 머문 1914~1915년까지의 1년 여 동안은 고대사의 인식과 현장 답사를 통해 대고구려 정신을 일깨우는 매우 중요한 기간이었다. 국내에 있을 때 이미 고대사와 고구려 역사, 우리 고토에 대한 수준 높은 연구를해온 그에게 고대사의 현장은 연구와 자료 수집에서 보물창고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윤세복 형제의 도움으로 환인현에 지내면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옛 지역인 남·북만주 일대의 유적과 민족의 영지 백두산을 두루 답사하면서,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민족사의 회복을 다짐하게 된다.

그가 남긴 저술은 수도 없이 많은데, 지금 남아 있는 그의 역사관계 저술들은 대부분 한국고대사에 관한 것들이며, 다음과 같은 특이한 점을 갖고 있다.

첫째, 한국의 상고사(上古史)를 새롭게 체계화하였다는 것이다. 종래에는 단군의 존재가 불확실했거나 일본학자들에 의해 부정되었는데, 그는 단군의 존재를 분명히 하고 그로부터 우리나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한국고대사를 부여와 고구려 중심으로 체계화시켰다는 것이다.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체계화는 단군이 다스린 만주가 우리 영토였음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고 만주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고구려의 웅혼함과 대외항쟁의 승리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셋째,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종래의 역사인식으로는한반도 안에 있었던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 밖에는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채호는 한반도 안에 삼한이 설치되기 전에 중국 동북지역에서부터 삼한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넷째, 백제의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을 구체화시켰다. 중국측 문헌을 검토하여 백제가 요서 하북 산동 지역을 경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다섯째,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존재하였다는 종래의 주장을 반박하며, 한사군은 땅위에 실제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 밖에도 단재가 주장한 고대사의 특이한 주장은 많다. 고구려의 연대는 원래900년이 넘었는데 그것이 삭감되어 70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그 하나이다. 그 때문에 위만조선과 싸운 세력은 한나라가 아니고 고구려의 대무신왕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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