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 김형규 자전거여행가] 관광객이 많이 찾는 함덕해수욕장에서 남쪽 중산간 방면으로 북선로를 따라 10리쯤 내려가면 선흘리 마을어귀에 난데없이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오랑캐나 왜구에 대비한 방어선이라면 산악지형이나 해안선에 구축해야 타당하지만 그런 용도는 아닌듯하다. 축조 형태로 봐선 기존의 성벽터를 복원한 듯하다.
제주 4.3사건 유적 설명에 따르면 이곳 선흘리 낙선동 4.3성(城)은 방어용이 아닌 수용시설이다.
1948년 11월 초토화작전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선흘리 주민들은 자연동굴이나 들판에 움막을 짓고 숨어살다 무장대로 오인돼 다수가 희생됐다. 근근이 살아남은 주민들은 이듬해 봄 강제노역으로 낙선동에 성을 쌓고 집단 거주했다. 미군정은 초토화작전으로 집을 잃은 제주도민들이 무장대로 합류하지 못하거나 연결책 노릇을 하지 못하도록 통제해야 했다. 거처를 잃은 주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제주도 곳곳에 낙선동과 같은 성을 쌓았다.
낙선동 성의 규모는 가로 150m, 세로 100m, 높이 3m, 폭 1m의 직사각형 모양이다. 성밖은 너비 2m, 깊이 2m의 도랑에 가시덤불을 놓아 무장대의 침입을 막았다.
성이 완공되자 잠만 겨우 잘 수 있는 함바를 짓고 집단생활에 들어갔다. 성밖 출입은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했고 야간통행은 금지였다. 대소변은 엉덩이만 겨우 가릴 수 있는 높이로 돌담을 쌓아 해결했다.
남자들이 상당수 희생되고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은 6․25 때 대부분 자원입대했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보초는 16살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의 몫이었다. 그들은 낮엔 밭에서 일하고 밤엔 성을 지키는 고단한 생활을 이어갔다. 주둔 경찰의 먹을거리까지 조달하느라 고초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선흘리 주민 250세대는 5년간 이곳에서 생활했다. 돌을 쌓고 군데군데 기둥을 박은 위에 새(띠풀)를 덮은 함바에서 노예처럼 잠을 잤다. 건설현장식당으로 알려진 ‘함바’는 일제 강점기에는 가건물로 통했다.
선흘리 주민들은 1956년 통행 제한이 풀리면서 원래 터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낙선동성은 4․3 당시 축조된 성 가운데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유적이다. 오랜 동안 훼손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되찾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2007년 복원됐다.
현기영의 단편소설 ‘도령마루의 까마귀’에는 성을 쌓느라 강제동원된 여편네들과 늙은이, 어린 아이들의 고달픈 삶과 애환이 담겨 있다. 성 밖에 두고온 아들과 어딘가에 도망쳐 숨은 남편을 다시 만날 희망에 고역을 참는 여인 귀리집(貴日宅)은 어느날 송장더미에서 죽은 남편 시체를 발견하곤 절망한다. 소설은 귀리집이 까마귀떼의 습격으로부터 남편의 시신이라도 온전히 지키기 위해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영순이어멍과 담가에 담긴 시체를 담 밖으로 내던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도령마루의 까마귀’에선 제주도민에게 닥친 비극의 근인을 가늠케 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까마귀 오 순경이 메고 있는 총대엔 어서 점호를 끝내라고 태극기가 조급하게 펄럭인다. 흰 광목 천 바탕에 청홍 색깔이 아주 뚜렷하다. 새것인 모양이다. 며칠 전만 해도 일본기 히노마루 붉은 원의 반쪽에다 검은 먹칠 바르고 네 귀엔 윷짝을 그려넣어 만든 헐어빠진 기를 달고 나오더니 어느새 새 걸로 개비했나? 진작 그럴 것이지.(생략) “일본놈 치질 똥고망 핥으며 해먹던 것들인디. 같은 섬 동포 갑죽 벗기기를 흉년에 솟깃대 벗기듯 하던 것들이 새나라 경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오죽헐 거여? 일본기로 태극기를 맹그는 거나 일본 순사 출신을 대한민국 경찰로 맹그는 거나 매한가지가 아니냔 말이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