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곳에가면 이야기가 있다] 대전의 일상 한가운데에서 만나는 항일의 정신들
    [그곳에가면 이야기가 있다] 대전의 일상 한가운데에서 만나는 항일의 정신들
    (95)항일 순국지사 송병선, 송병순 형제를 찾다.
    •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 승인 2019.03.2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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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모닝충청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기자] 판암역에 내려 10분 거리인 용운동 주택가 한가운데에는 문충사(文忠詞)라는 사당이 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오래된 건물 앞에는 잔디가 깔린 너른 마당이 있고 두 선비의 입상이 서있다. 뒤로는 선비가 임금에게 올린 유소(마지막으로 올린 상소문)가 새겨있다. 아무 정보 없이 찾아온 사람이라면 그저 사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 사당과 서원을 지키고 관리하는 어르신께 그냥 물어도 좋다. 바로 우암 송시열의 13대손이자 문충사가 기리고 있는 순국지사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심석재 송병순(心石齋 宋秉珣) 형제의 4대손인 송영문 씨이다.

    “문충사는 이 두 선생님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그리고 용동서원(龍洞書院)이 같이 있죠. 사당이 있고 서원이 같이 있는 전형적인 문화재입니다. 대전의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오래된 유적 같지만 지금 사람도 살고 있고 또 서원에서는 함께 글공부하고 글씨를 배우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제일 먼저 어르신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당으로 이끌었다. 사당 안에는 정면으로 연재 선생의 영정, 오른쪽으로는 심석재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송영문 씨는 정성스레 천을 걷어 두 영정을 보여주고는 서둘러 닫았다.

    “우암의 9대손인 두 분 형제는 조선말 학자이자 선비의 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조정에서 수많은 관직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읽고 글 쓰고 후학들을 기르는 학자였죠. 그러다 일제에 의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형인 연재 선생은 대노하시어 바로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고 며칠간 곡기를 끊었습니다.”

    조정에서 반응이 없자 연재 송병순 선생은 임금을 만나 나랏일을 바로잡으러 경성을 향해 출발한다. 때는 엄동설한이었고 제자 다섯을 이끌고 걸어서 출발한 선생은 이미 일흔의 노구였다. 열흘을 걸어 궁에 도착한 연재 선생은 고종을 만나 나라를 팔아먹은 다섯 역적을 즉각 처단할 것을 요구하면서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주권과 자주국임을 선포하라는 불같은 상소를 올린다. 고종은 알았다며 물러가 한동안 쉬라고 선생을 물린다. 그때 일본경찰이 와서 일행을 차에 태우고 서울역으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자결을 감행하기 위해 몸에 숨긴 칼과 소매의 약물을 모두 빼앗기는 수모를 겪는다. 강제로 기차에 태워진 일행은 대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치욕을 겪고 집에 돌아온 연재 선생은 마지막 유소를 써 조정으로 보내죠. 그리고 집안 식구들에 유언을, 후학들에게 살 방향을 이릅니다. 나머지 일은 동생인 송병순 선생이게 일임하죠. 그렇게 궁에서 돌아온 지 사흘 만에 음독해 자결하십니다. 그날이 섣달그믐이었어요. 설을 맞아 한 살 더 먹으면 그만큼 치욕만 늘어난다고 생각하신 거죠.”

    이후 고종은 연재 선생에게 의정의 자격을 주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발걸음은 사당 아래 용동서원으로 향한다. 서원 안에 들어서자 안쪽으로 붓글씨를 쓰는 테이블이 보이고 오래된 캐비닛 안에서 자료를 꺼내 들고 나온다. 책자 안에는 연재 선생의 일대기와 저작, 유소 등이 실려 있다.

    “초야에 있는 송병선은 목숨을 끊으려하면서 삼가 대궐을 향해 피눈물을 흘리며 상소를 올려 성상께 영결을 고합니다.……”

    선생의 마지막 상소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간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일화를 꺼낸다.

    “연재 선생의 몸종이 있었어요. 이름이 공임인데 16살 먹은 처자로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선생이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자결했다고 해요. 지하에서 자신이 선생님을 모시겠다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선생의 인덕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야기는 동생 심석재 선생으로 이어진다. 을사년에 그렇게 형을 보낸 동생은 역적을 처단해야 한다는 토역문(討逆文)을 지어 전국에 돌리면서 국권을 되찾자는 호소를 보냈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후 일제는 관직으로 회유하고 금품으로 유혹한다. 그러나 동생 심석재 선생은 이렇게 일갈한다.

    “네가 차라리 내 배를 갈라놓을지언정 내 손에 받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송영문 씨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형님이 자결하고 나자 동생도 자결할까봐 집안에서는 감시가 심해집니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경술년에 나라를 빼앗기자 산에 올라 자결하려 하죠. 그러나 제자들의 만류로 이루지 못합니다.”

    동생 심석재 선생은 2년 뒤 빼앗긴 나라를 한탄하며 음독 자결한다. 부인의 장례를 치르며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이루어진 일이다. 이렇게 나라를 걱정하던 두 형제는 목숨으로 그 중요성을 일깨우고 떠난다.

    “이렇게 자결로 나라를 걱정했던 우리 송씨 집안이 원래 손이 귀한 가문이에요. 연재 선생의 장남은 사실 동생 심석재 선생의 큰아들이었어요. 형에게 후사가 없자 자신의 큰 아들을 보내 양자를 삼은 거죠. 이 과정이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고 예조판서의 허락이 있었어요. 나라에서 양자 삼는 과정을 공적으로 인정한 거죠. 용동서원에서는 그 문서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역사는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피와 헌신이 쌓이고 쌓일 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 큰 풍랑이 질 때 어떤 이는 죽창이라도 들고 나가 싸웠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옳음을 설파했다. 이 과정을 송영문 씨는 이렇게 얘기했다.

    “학자들은 끊임없이 옳음을 논의했어요. 무엇이 옳고 어떻게 주권을 되찾을지를 논의하고 몸을 던지는 과정이 하나둘 쌓여서 3.1운동으로 이어지고 또 독립으로 나아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선생님들도 의심할 수 없는 순국선열이십니다.”

    봄이다. 일제강점기 어느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빼앗겼던 들을 다시 찾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많은 선조가 있다. 이번 봄에는 봄이 오는 들에 나가 이것이 진정 우리의 들임을 확인하는 기회를 가져보는 일도 즐겁다. 용운동의 문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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