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가면 이야기가 있다] 새로운 사회를 꿈꾼 비운의 개혁가
[그곳에가면 이야기가 있다] 새로운 사회를 꿈꾼 비운의 개혁가
(96) 충암 김정의 유적을 가다
  •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 승인 2019.04.2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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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대전에서 옥천을 향하는 국도를 타고 판암동을 지나면서부터 유심히 살펴야 한다. 대청호로 드는 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회남로를 타고 1분여를 달리면 화려하지 않으나 기품이 있고 아늑하면서 규모가 있는 고가(古家)를 만난다. 대전의 인물인 충암 김정 선생을 모시고 있는 유적이자 종가이다. 주소는 대전시 동구 회남로 117.

널찍한 주차장이 보이고 왼쪽으로 종가를 향하는 작은 길, 오른쪽 윗길로 잘 정돈된 묘소와 작은 사당이 보인다. 충암 선생의 부인이 묻힌 곳이다. 충암 선생과 그 후손의 묘소는 고가 뒤 언덕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경주김씨 충암공파 17대 종손인 김응일 씨가 휴일의 손님을 맞으러 내려온 길도 바로 그 언덕으로 이어진 길이다.

초로의 종손은 이내 묘소 아래 오랜 건물로 이끈다. 산해당(山海堂)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이야기가 시작된다. 역사는 모두 이야기이다.

“대청호가 생기면서 충암 할아버지가 계시던 내탑리가 물에 잠기게 됐죠. 그래서 이장을 하기 위해 관을 꺼냈는데 관 뚜껑이 하나도 안 썩은 겁니다. 500년 된 나무인데 그래서 선친께서 그 나무로 여기 현판을 했어요. 산해당이라는 당호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충암의 학문은 높은 산과 같고 깊은 바다에 이른다’고 한 말에서 따왔습니다.”

이제 충암 김정 선생에 대해 짧게 소개해야 한다. 충암은 성리학에 근거해 조선을 이상사회로 만들려 했던 개혁가였고 그 과정에서 정치에 희생당한 비운의 선비였다. 보은에서 태어난 충암 선생은 시서화 모두에 능통한 천재로 자라 열넷에 초시에 장원을 했으나 스스로 물러나 공부에 전념하다가 스물둘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간다. 그러나 연산을 내리고 중종을 내세운 반정세력의 패악을 보고는 스스로 외지로 내려온다. 그리고 순창군수 시절, 왕비 신씨를 폐비시킨 반정세력에 강력히 항의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기회는 온다. 충암은 새로이 권력을 잡은 조광조와 함께 다시 조정에 나가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한 개혁에 착수한다. 그러나 반정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에 화를 입어 다시 귀양길을 떠난다. 결국 이상사회의 꿈은 무너지고 다시금 유배생활에 처해진 것이다. 이후 제주로 유배를 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는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음력 시월 그믐이 충암 할아버지 제사입니다. 올해로 498번째 제사입니다. 제가 17대 종손이니까, 1대를 30년 잡으면 500년이 되는데, 충암 선생 돌아가신지 바로 이듬해부터 한해도 빠지지 않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제사는 경주김씨 충암공파 후손이라면 죽기 전에 한번은 오고 싶어 하는 제사입니다.”

물론 제사 지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빠지지 않은 500번의 제사가 왜 남다른지는 사연을 들어야 알 수 있다. 충암 선생은 조정으로부터 사약을 받았다. 그러니까 당시에 역적이었던 것이다. 그때는 역적의 시신을 거두는 이 또한 역적이 되었다. 그러니 제사를 지낼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충암의 인품을 익히 알던 제주의 백성이 시신을 자신의 마당에 가매장하였고 수소문해 일가가 찾아와 몰래 시신을 수습해 대전 내탑으로 모셨다.
 
“불천위(不遷位)가 뭔지 알아야합니다. 어른이 돌아가시면 보통 4년 동안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산소로 옮기죠. 그 다음부터는 시제로 조상들 모두 한 번에 제사지냅니다. 공자나 임금 정도 되면 계속 제사를 집에서 지냅니다. 그러니까 위대한 인물로 인정받은 분은 신위를 옮기지 않고 계속 집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하는 거죠. 충암은 불천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으로 하면 다시 위대한 인물로 인정받은 거죠. 그런데 그게 충암이 돌아가시고 270년이 지난 정조 때의 일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죽은 선비의 공과를 계속 논의하고 그제야 불천위를 내렸던 겁니다. 놀라운 일이죠.”

그러니까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상황에서도 그 이듬해부터 몰래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는 충암 선생에 대한 부인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옳은 일을 했고 언젠가는 반드시 충심을 인정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또 있다. 충암 선생의 묘지 옆에는 알 수 없는 작은 비석이 서있다.

“이런 종류의 비석을 보통 백비(白碑)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아무 글도 써있지 않은 비석입니다. 대개 청백리에게 백비를 세우는데 거기에는 만든 날짜라도 적어놓아요. 그런데 이것은 그것조차 없어요. 그래서 확인하는데 시간이 걸렸죠.”

대청호가 생기면서 관이며 눈에 보이는 다른 비석들은 모두 파악해 이곳에 옮겨 모셨다. 이후 물이 들었고 그곳에서 고기 잡는 일가들이 물에 잠긴 옛 묘소 근처에 무언가 있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냥 흰 비석이었다. 이후 문헌으로 확인한 결과 부인이 시신을 모실 때 몰래 만들어 묻었던 비였다.

“1545년에 복권이 되었으니까 22년 동안 죄인의 신분이었죠. 시신도 옮기면 안 되는 데 몰래 모셔와 장사지냈으니 봉분도 못하는 상태였죠. 그럼에도 부인은 세워놓지도 못하고 글도 쓸 수 없는 비석을 만들어 땅 속에 묻은 겁니다. 1978년에 이장했는데 3년 후에 비석이 발견되어 이리로 가져왔어요. 중요한 유산입니다.”

충암 선생과 부인은 거의 같이 지내지 못했다는 얘기에 백비는 더 가슴 아픈 상징으로 보였다. 충암 선생은 결혼을 하고 내탑에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관직을 위해 한양으로 떠났다. 그리고 계속 유배생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부인은 남편의 죽음 이후 바로 자결하려하였으나 노모를 생각해 8년 동안 봉양한다. 그리고 노모가 죽자 8일 동안 굶어서 자결했다.

내탑에서 이장한 현재의 자리에도 여러 이야기가 같이 한다. 지금의 묫자리는 김응일 씨의 9대조가 먼저 묘를 썼다. 지금부터 250년 전이었다. 당시에 이곳은 물이라고는 없는 깊은 산골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지명도 세천으로 실개울만 흐르는 깊은 산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묫자리를 보던 선조에게 지관은 연꽃이 물에 떠있는 형상의 최고의 명당이라고 이 자리를 높였다. 그 지관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쫓겨났다. 그러나 또 다른 지관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세 명의 지관이 명당이라고 같은 말을 하자 그때야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이지만 이렇게 물이 차올라 누가 봐도 명당자리가 되었습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종손 부부는 바쁘다. 매년 제사 때가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전국에서 손님들이 온다고 한다. 그들의 숙식은 물론 제사음식까지 모두 직접 준비한다. 그래서인지 종손의 부인은 종가음식으로 소문난 손맛을 자랑한다.

봄꽃들이 활활 타오르는 요즘 아직도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던 의기가 타오르는 종가에 들러 우리의 역사의 온도를 느껴보는 일도 봄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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