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충남 가야산 남연군 제각 터·이름 밝혀
[시민기자] 충남 가야산 남연군 제각 터·이름 밝혀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 최근 남연군 제각 위치와 명덕사란 이름 고증 성과
  • 이기웅
  • 승인 2014.10.2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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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사지 발굴현장의 모습. 하얀색의 실선이 남연군 제각터.
[굿모닝충청 이기웅 시민기자] 충남지역 한 민간역사연구소가 흥선 대원군이 가야산에 지은 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 제각의 위치와 이름을 고증했다.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는 최근 1872년 고지도와 고종 실록의 고증을 통해 1960년대 초에 사라진 남연군의 제각 위치와 제각의 이름이 명덕사(明德祠)란 사실을 고증했다고 밝혔다.

이번 고증은 가야산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잡고 잊혀져가는 향토사를 지켜가기 위해 올 4월에 발족한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의 첫 성과물이다.

가야산 남연군묘는 대원군이 생전 아버지의 묘를 쓰는 일에 운명을 걸며 서울에서 최고의 석공과 목수들을 동원해 왕궁의 건축물과 버금가게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원군은 남연군 묘를 연천에서 가야산의 상가리로 면례하며 별반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 곳은 바로 백제시대의 사찰인 가야사가 있던 곳으로 남연군묘를 면례하기 위하여 불태워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며 대원군이 실권을 잡기 전으로 절집을 불태우는 행위는 의궤(儀軌)로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1872년 이전에 가야사 터에 지어진 남연군의 제각의 존재와 이름에 대한 고증은 고종실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 고종 9년 임신(1872, 동치11) 10월 7일(무오)의 기록에 보면 ‘조경호가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경기전의 일을 마친 후에 이어 덕산(德山)으로 가서 남연군(南延君)의 묘소를 살펴보니 탈이 없었고, 명덕사(明德祠)를 살펴보니 탈이 없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예조 판서도 같이 덕산의 묘소에 나아갔는가?”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돌아오는 일정에 역참을 배정하였기 때문에 과연 예조 판서와 같이 묘소에 갔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소를 살펴보니 어떻던가?”‘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남연군묘의 제각이 명덕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1872년 덕산군지도. 남연군묘와 제각을 중심으로 작성된 고지도.
당시 명덕사라는 제각은 조선왕실 최고의 기술과 시설로 건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원된 석공과 목수는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로 1893년 남연군묘(가야사지)를 방문한 운양 김윤식은 서울왕릉에 버금가는 제각과 제실을 있었다고 '면양행견일기'에 기록한다.

면양행견일기는 ‘1893년 5월 초 5~6일 가야동에 도착하니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곳곳마다 물소리가 시끄럽게 했다. 남연군묘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가야사의 유적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을 에워싼 듯 멀리서 바라보니 맑고 깨끗했다. 예부터 이 산은 왕기가 있다고 일컬었는데 과연 이곳으로 묘소를 이장한 뒤에 성인이 탄생하고 이어서 용흥(임금)의 경사가 있었으니 지관들이 풍수를 떠드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산을 가꾸고 소나무를 기르고(조경) 각을(집) 짓고 비세우는 등의 일들이 능소보다 덜하지 않다. 보덕사는 동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역시 갑자년 이후로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라고 전한다.

이후 1940년대 의친왕비가 (송씨)아들인 이광이 개인적인 질환으로 선대가 모셔진 상가리의 남연군묘의 제실에서 요양하며 잠시 머물기도 한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사람이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제각의 건축물은 잘 보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가리가 고향인 김창남(75)씨는 “남연군 제각은 어린 시절 놀이마당으로 제각과 그 주변의 웅장한 제실은 높다란 담장이 온전히 있고 동쪽으로 정문이 있었으며 커다란 현판도 있었다”며 “사당에는 남연군의 영정이, 현판에는 명덕사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고 증언해 1960년대 초까지 남연군 제각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증언했다.

이번에 발굴된 제각은 일(日)자형으로 2채이며, 현재 기단은 3단으로 조성돼 이곳이 제를 드리기 위해 제단 등(무게가 있는)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2채의 제각 중 1개소는 제기 등을 관리하는 곳이고, 또 다른 1개소는 제를 직접 드리던 장소로 추정되고 있다. 제각 주변은 제각을 보호하기 위해 담장이 둘러져 있고 배수 등의 기능도 가능토록 돼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가야사지 발굴 책임자는 “왕실의 제각이 서울지역에 만 있고 왕실과 그 후손들에 의해 나름 잘 관리돼 있다”며 “제실 발굴의 예가 그동안 없어 남연군 제각의 발굴이 소중한 자료로 보여지는 만큼 추가 발굴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 관계자는 “왕실의 묘가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있으며 국가와 후손들이 잘 관리하여 그 터를 발굴할 기회가 없었으나 이번 고증으로 조선왕실 제각 터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다”며 “소중한 조선왕실의 제각 등을 복원, 향토유적으로 지역을 위해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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