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택영의 '파리팡세' 칼럼》 "랜드마크가 된 에펠 타워(Eiffel Tower as a Landmark of France)”
《정택영의 '파리팡세' 칼럼》 "랜드마크가 된 에펠 타워(Eiffel Tower as a Landmark of France)”
  • 정문영 기자
  • 승인 2019.07.2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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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랜드마크가 된 에펠 타워(Eiffel Tower as a Landmark of France)

Title : Eiffel Tower in the Night, Artist : Takyoung Jung, size : 38.5x 30.5cm, Medium : acrylic on canvas, Year : 2019, Collection : Museum of Kimdaljin Art Archive (이 작품은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에 영구소장 되어 있다.)
〈Title : Eiffel Tower in the Night, Artist : Takyoung Jung, size : 38.5x 30.5cm, Medium : acrylic on canvas, Year : 2019, Collection : Museum of Kimdaljin Art Archive〉 (이 작품은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에 영구소장 되어 있다.)

나는 지난 15년 여 전부터 파리에 살면서 추상 작업에 몰두해 왔고, 간간이 에펠탑을 소재로한 드로잉과 작품들을 무수히 그려왔다. 내가 에펠탑을 즐겨 소재로 작품을 했던 데에는 그것이 주는 강한 인상과 유니크한 형태의 유려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치 한국의 기와지붕의 곡선이나 전통한복 저고리의 소매에서 보이는 우아한 곡선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한국미의 원형prototype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작업에 앞서 에펠탑에 대한 무수한 기록들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에펠탑을 모티브로 한 드로잉과 작품을 많이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파리 7구에 우뚝 솟아있는 철탑 에펠 타워! 전 세계인들은 이곳을 찾아 연간 9천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610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 관광수입의 액수도 놀랍지만, 이 탑으로 인한 국가의 위상과 한 국가의 랜드마크로서의 확고한 획을 그은 조형물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게 된다.

프랑스 사람들은 스스로 파리를 '빛의 도시(Ville lumière)'라고 부른다. 그러한 파리의 역사는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리'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 시대에는 라틴어명인 루테티아(Lutetia), 또는 루테티아 파리시오룸(Lutetia Parisiorum)이라고 불렸다. 이 파리의 옛 명칭에 해당하는 프랑스어는 뤼테스(Lutèce)이다. 오늘날 쓰이는 ‘파리’라는 이름은 BC 300년경, 켈트족의 파리지(Parisii)라는 부족이 센강의 섬들에 정착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에펠탑은 예술작품인가, 아니면 조형물인가, 아니면 상징물인가?

이 질문에 얼른 답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세계인들에게 이 철탑이 마치 예술작품으로 부지중에 인식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맞아 '파리 만국박람회(EXPO)' 행사를 위해 세워진 에펠탑은 예술작품도 조형물도 아니다. 이는 프랑스 공학자이자 토목기사였던 귀스타브 에펠에 의해 세워진 높이 약 324m의 격자형 철탑이다. 19세기 말 에펠탑은 한발 앞서, 철(鐵)로 대표되는 산업사회가 도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디자인으로, 1991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파리의 대표적인 명물이 된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에펠탑이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프랑스의 정치가들과 유명한 학자들, 비평가들의 극렬한 반대와 비판이 있었다.

레온 블로이는 “진정으로 비극적인 가로등”이라 혹평했고, 폴 베를랑은 “뼈만 남은 종탑”이라 폄하했으며, 프랑소아 코피는 “불완전하고 혼란스럽고 추한 강철 운동기구탑”이라고까지 혹평했다. 시인 모파상은 “사이클롭스의 거대한 기념비를 세울 듯한 볼썽 사나운 뼈대 위에 공장 굴뚝같이 우스꽝스럽게, 가늘게 사라진다”라고 에펠탑을 깎아내리는 시를 썼고, 호리스-칼 히스만은 “짓다 만 공장 굴뚝, 벽돌을 기다리는 잔해, 깔때기 모양의 석쇠, 구멍으로 가득찬 좌약”이라고까지 비아냥거렸다.

그러한 이유는 에펠 탑이 새로운 종류의 미학을 선보였기 때문인데, 사람들이 이를 받이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에펠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최소한의 재료로 가장 강력한 힘을 내는 경제적, 구조적 효율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는 순수하고 효율적이며 기술적으로도 뛰어난 구조물이 예술작품으로 여겨지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탑이 지어졌을 당시, 사람들은 그 대담한 모양에 놀라워했다. 에펠은 이 예술적인, 혹은 보는 사람에 따라 비예술적인 것을 만드는 데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기술이 아닌 그 디자인에 대해서 욕설을 들었다. 하지만, 에펠과 그의 기술자들은 숙련된 다리 건설자로서 풍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만일 그들이 세계 최고 높이의 구조물을 세우게 될 경우, 그것이 바람[風]을 버텨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에펠씨는 프랑스 신문 '르 떵(Le Temps: 시간)'과의 인터뷰에서 “지금껏 내가 이 탑을 디자인하는 데 있어서 가장 신경쓰고 있는 현상이 무엇이었나? 그것은 바람의 저항이었다. 나는, 수학적인 계산이 알려주는 당연한 형태를 따르고, 강함과 아름다움의 커다란 인상을 심어주게 될 이 기념물의 바깥 모서리가 가진 곡선을, 결국 이것이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 묵직한 디자인 그 자체로 다가가도록 지켜내왔다."고 말했다.

에펠탑은 단지 철골을 높이 쌓아올린 단순한 탑이 아니라, 엄청난 설계도면과 치밀한 계획에 의해 탄생한 걸작이다. 높이와 강풍에 견뎌야만 하는 전제조건과 최소한의 재료만을 사용한, 놀랄 만큼 최적화된 건축물이다. 에펠은 내부 구조를 숨기기보다는 그 뼈대를 그대로 드러냈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뼈 구조와 같은 “숨은 조화의 법칙”을 사용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에펠탑이 건재하게 우뚝 솟아있게 된 것이다. 이 탑을 쌓아올리는 데 18,000여 개의 쇳조각을 250만 개 리벳으로 현장에서 조립했으며, 10~30m 씩 2년 2개월에 걸쳐 쌓아올렸다. 정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바람부는 날 에펠탑의 꼭대기 부분은 좌우로 5~6m 씩 흔들리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에펠이 어떤 수식을 사용하여 형태를 잡고 바람의 저항을 줄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설계 프로그램은커녕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모든 것을 직접 계산해, 망치로 하나하나 두드려 쌓아올린 에펠만의 과학이 놀라울 뿐이다.

에펠탑 꼭대기에서는 일몰 후, 사방 10 km까지 비치는 라이트 빔 쇼가 정시마다 10분 씩 빛을 발한다.

원래 에펠탑은 20년 동안만 그 자리에 세워졌다가 철거될 예정으로 정부와 계약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꼭대기에 라디오 안테나와 TV 수신기를 설치하도록 하는 에펠씨의 지혜로 결국 철거를 면해 오늘날까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귀스타브 에펠은 예술가였는가?

그는 화학을 전공한 토목기술자로 유럽의 많은 철교를 설계하고 건설했던 엔지니어였다. 그는 에펠탑을 쌓기 위해 1,700여장의 설계도면과 3,700여장의 부분도면을 그렸고, 25개월에 걸쳐서 세워졌다. 그는 예술가가 아닌, 철도를 많이 건설한 경험이 풍부한 엔지니어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에펠탑을 '수직으로 세운 철도'라는 별칭을 붙여 특강을 하기도 했다.

에펠씨는 프랑스와 미국의 우정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의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여신상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져 미국으로 수송되었고, 이 여신상이 우뚝 서기 위해서 내부 철골의 구조물 설계와 제작을 함으로써 가능해졌던 것이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히틀러도 에펠탑을 좋아해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를 좋아했고, 에펠탑의 약 1700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는 이야기까지도 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면서 폰 콜티츠 장군에게 에펠탑과 파리를 파괴할 것을 지시했으며 아홉 번이나 확인했다고 한다. 다행히 폰 콜티츠 장군이 ‘나는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면서 히틀러의 명령에 불복해 지금 우리가 에펠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많은 화가들이 에펠탑을 소재로 그렸지만, 샤갈의 ‘에펠탑의 신랑 신부’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우리나라도 이처럼 파리의 에펠탑 같은 훌륭한 조형물을 세워, 그것이 국가의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는 렌드마크가 되어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증폭시킬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이 인천국제공항에서 시내의 중심으로 향할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올 때, 프랑스의 에펠탑을 능가하는 거대한 조형물이 세워진 서울 한강변의 그 찬란한 조형물을 상상해본다.

July 2019

<파리팡세 정택영>      takyoungj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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