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 채원상 기자] 독립기념관이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김구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김구 선생은 1876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893년 동학에 들어가 동학농민전쟁에서 황해도 지역 동학군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1896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살해해 옥고를 치렀다.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898년 탈옥해 공주 마곡사 등지에서 승려로 지냈다.
이후 애국계몽운동에 매진한 선생은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교육 사업에 힘을 쏟았다.
1908년에는 황해도 지역 교육계몽단체인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고 학무총감으로 추대됐다.
한편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서 활동한 사실이 밝혀지며 다시 옥고를 치렀다.
이때 김구 선생은 ‘백범白凡’을 호로 삼으며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시키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에 합류했다.
이후 경무국장으로서 임시정부 요인 경호 등을 맡았고 내무총장과 국무령, 국무위원 등을 맡아 임시정부를 이끌어 갔다.
특히 임시정부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을 맡아 미수로 끝난 일왕 처단 작전(이봉창), 조선총독 처단 작전(이덕주·유진식), 관동군사령관 처단 작전(유상근·최흥식) 등을 지휘했다.
일본군의 침략으로 중국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다가 65세인 1940년 충칭에 정착한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인 주석으로 활동했다.
충칭에서 그는 임시정부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좌우통합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했다.
1945년 11월 환국한 그는 좌우 남북 대립이 심화되자 하나 된 조국을 위해 노력하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다.
그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