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명사의 학창시절' 월진회 명예회장 이우재 : : 오늘아침 동네한바퀴
[동영상] '명사의 학창시절' 월진회 명예회장 이우재 : : 오늘아침 동네한바퀴
  • 김영태 기자
  • 승인 2019.08.1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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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신선하게 배달된 우유, 분주한 등교 준비, 출근을 서두르는 발걸음 등이 있습니다. 매일 매일 접하는 뉴스도 아침과 어울리는 이미지입니다. 굿모닝충청이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아침 동네 한바퀴’는 언제 들어도 낯설지 않은 것들을 소개합니다. 우연 속에 발견하는 진심, 따뜻한 웃음과 감동, 잊고 사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려 합니다. 오늘 아침, 동네 한바퀴 걸어보실래요? 우리 동네에는 어떤 숨겨진 보물들이 있을까요? [편집자주]

 
명사의 학창시절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본보기가 된다. 남다른 탄생과 고난과 시련, 이를 극복하는 비범한 능력, 그리고 사회적인 성공으로 이어지는 보편적인 서사구조는 자연스럽게 감정이입된다. 이번 ‘명사의 학창시절’ 코너의 주인공은 (사)매헌윤봉길월진회 이우재 명예회장(전 국회의원)이다. 농업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한 평생을 걸어 온 이우재 회장의 어린 시절 꿈과 끼를 들어봤다.

 폐허가 된 어느 집 담벼락 한 모퉁이. 한 손에 깡통을 차고 구걸을 하던 소년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깜박 잠이 든다. 굶주림에 지친 소년은 꿈속에서 더 이상 배 곪지 않아도 되는 유토피아, 이상국가를 만난다. 잠에서 깬 소년은 꿈속에서 본 이상국가 건설을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주세중의 수필 ‘푸른꿈’을 읽고 있던 고등학생 이우재의 두 주먹에도 힘이 들어갔다. 당시 위궤양, 복막염 그리고 늑막염으로 학교를 쉬고 있던 이우재 선생은 책이 유일한 벗이었다. 수필 ‘푸른꿈’은 소년 이우재의 마음을 뒤흔든 책이었다. 이상국가 건설을 다짐하는 주인공 소년은 고스란히 이우재 선생의 꿈이 됐다.

1950년대 대한민국 국민의 70%가 농업에 종사했던 시대상황을 보더라도 선생은 농업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살길이라 생각했다. 선생은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 진학한 뒤 평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힘썼다.

이우재 선생은 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다행히 예산에 99칸 한옥을 지을 만큼 부유했던 외가의 도움으로 어려움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 선생은 “어머니께서 자기 스스로 사랑하지 않으면 남도 사랑해 주지 않는다”면서 “머리 모양과 복장을 단정히 하라”고 가르치셨다고 회고했다.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선생은 외모뿐 아니라 마음가짐과 행동을 가꾸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소년 이우재의 삶에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백범 김구와의 만남이다.

“해방이 되자 백범 선생이 윤봉길의사의 비석 제막을 위해 예산에 내려오셨어요. 저를 비롯해서 초등학생 10명이 제막식 행사에 동원되면서 김구 선생님을 만난거죠.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이 오늘날까지 독립단체 월진회에서 일하게 된 운명이 된 것 같습니다.”

월진회는 매헌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해 폭탄의거를 하기 전에 고향 예산지역에서 조직한 애국 계몽운동 단체다. 농업국가였던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농업인들의 의식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윤 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됐고, 해방을 한 해 남기고 제자들이 비빌결사체로 명맥을 이어 현재까지 남게 됐다.

 월진회를 설명하던 이우재 회장은 고등학교 은사인 윤규상 선생을 손꼽았다.

“윤규상 선생님은 윤봉길의사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재산과 땅을 월진회 운동을 위해 헌납 하신 분이예요. 학교 매점 운영을 학생회에 맡겨 소비조합형태로 운영했던 은사이기도 합니다. 제가 농촌운동가의 길을 걷는데 큰 영향을 주셨어요. 윤규상 선생님을 비롯한 예산의 많은 지식인들이 윤봉길의사의 본명인 우의(禹儀)를 따서 우진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에도 월진회를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늑막염 치료를 위해 학교를 쉬던 선생은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농촌계몽운동에 대해 눈을 뜬다. 낙농국가로 유명한 덴마크관련 서적을 접하면서 덴마크의 농촌지도자 그룬트비히(Grundtvig)와 같은 지도자를 꿈꾸고 농촌 부흥을 통해 잘사는 대한민국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때 인생의 목표를 나라 부흥을 위한 농촌운동으로 잡았어요. 축산관련 수의사가 돼 같은 이상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서 농촌 활동을 하면 우리도 덴마크처럼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이듬해 선생은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1학년 한 학기를 다니고 학비마련이 어려위진 선생은 휴학을 결정했다. 좌판장사를 비롯한 공사장 막노동을 전전하며 온갖 고생을 겪었다.

든든한 외가가 있는데 왜 사서 고생하느냐 싶지만 학창시절 내내 고민한 ‘자립(自立)’에 대한 의지는 도움을 거부했다. 물론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어렵게 마련한 한 학기 학비로는 모든 게 끝나지 않았다. 졸업할 때까지 스스로 자립해서 학교를 마치고자 했기에 ‘똥 푸는 일’까지 손을 댔다.

“구청 위생과에 계시는 친척을 통해 똥을 치우는 일을 소개받았어요. 6,7명이 한방에서 자는데 오물냄새가 말도 못하게 심했지요. 내가 맡은 일은 고작 푼 똥을 지키는 일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대생이 이런 일을 한다고 없던 일을 만들어 준거였어요. 나 한사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임금이 줄어들게 된 거죠. 이건 아니다 싶어서 곧장 다른 일을 찾았습니다.”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다수가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선생의 신념이 갖춰지던 무렵이다.

서울대 재학시절 선생은 철학, 경제학 등의 교양수업을 들으면서 문리대 학생들과 의기투합했다. 학생회일을 꾸준히 하던 중 4학년이 되면서 수의학과 학생회장과 총학생회장을 맡게 됐다. 당시 학생들의 관심사는 통일문제였다. 서울대학생들은 민족통일연맹을 조직했고, 선생도 의장단으로 선출됐다. 자연스레 농민운동과 통일운동을 함께 이끌었다.

1961년 5월 20일. 민족통일연맹 활동의 주동자로 체포돼 서울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됐다.

“통일문제도 중요하지만 저로서는 농민운동에 더 매진하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제 주변의 농민사회와 농촌을 부흥시키는 일에 전념하다보면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고, 나아가 통일도 빨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대학을 졸업한 이 회장은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짬을 내서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등 특유의 주경야독이 어어졌다. 농민운동가와는 동떨어진 서울 생활이었지만 공직생활은 훗날 사단법인 설립의 노하우를 배운 일터였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농업근대화연구회를 설립했다. 농촌현장에서 농민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농촌운동을 실천하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조직이다. 많은 대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이재오 자유한국당 상임고문이나 한명숙 전 총리 등이 이때 모인 멤버들이다. 연구회를 통해 배출한 농업경제학자로는 장상환, 황한식 박사 등이 있다.

연구회 활동은 농촌운동에 엔진을 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원룡 목사를 중심으로 건전한 ‘중간집단’ 육성으로 이어졌다. 건전한 중간집단이란 당시 양극화된 정치 상황에서 학생, 노동자, 농민, 교회, 여성 등이 주축이 된 좋은 사회를 만드는 조직체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5년동안 수많은 농민운동가를 양성했다.

하지만 정치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1970년대 후반 단체 형성에 예민하던 정부가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1979년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연행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카데미 교육생 중 한명이 정치현실을 반영한 개사된 노동가를 불렀고 경찰이 집중 추궁하면서 당시 여성 교육담당 이던 한명숙씨가 잡혀들어갔어요. 이 일로 아카데미 간사들이 줄줄이 걸려들었어요. 마치 짜여진 각본 같았습니다. 육체적인 고문을 통해 원하는 대답을 얻어냈고,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는 순간을 겪었습니다.”

옥고를 치른 일을 회상하면서 그는 경찰을 피해 도주하면서 세신사 3년, 고물주우며 2년을 도망다닌 교육생의 일화를 꺼냈다.

“저도 3년 5개월 동안 수감됐다가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어요. 어느날 그 교육생이 찾아왔어요. 대뜸 당신들은 사회에서 한자리씩 자리 잡았는데 나는 뭐냐고 묻습디다. 젊은 날의 황금같은 시간을 도망자의 삶을 살았으니 나올법한 이야기죠. 지금도 함께 고생한 많은 교육생들의 노고에 보답하지 못해 한이 남아 있습니다."

이우재 회장은 굵은 눈물로 말을 대신했다.

5공화국이 파국으로 치닫던 1980년대 중후반, 이른바 ‘3김 시대’가 열렸다. 재야 단체에서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에 대응할 진보정당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리고 1990년 11월 민중당이 출범했다.

“민중당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만든 정당입니다. 저는 제도권에 들어가서 정치적 힘을 키워야 민주화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민중당을 통해 스웨덴같은 경제적 평등 정책을 우리사회에서 펼치고자 했어요.”

하지만 당대표였던 선생의 기대와 달리 민중당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다만, 현실 정치의 꿈은 15·16대 국회의원으로 10여년 더 이어졌다.

 평생 농촌계몽을 위한 삶을 살았던 이 회장은 스스로를 ‘농촌운동을 만든 사람’이라고 불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우재 회장은 농촌부흥운동에 그치지 않았다. 국민의 먹거리가 곧 건강한 국민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리고, 국내 최초로 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을 설립했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일이었죠. 농촌에서 생산한 무공해 농산물을 식단에 올려 국민의 건강은 물론 농민들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주고자 조합을 만들었어요. 과거의 농촌은 먹고 사는 삶의 경제문제였지만 현재는 생명철학의 문제로 바라봐야 합니다. 농업은 국민의 건강한 먹거리를 창출해 국민의 생명을 이어나가는 일이기 때문이예요. 친환경 농업형태로 생명산업과 연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농촌운동을 만들고 이끌어 온 주역으로서 이우재 회장은 매헌 윤봉길 의사의 월진회 활동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과 함께 오늘날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단 두 개뿐인 독립단체이기도 하지만 농촌운동의 모태가 된 단체라는 점에서 더 큰 명예를 갖는다고 말한다.

이 회장은 최근 한일관계에 대해 조언을 했다.

“일본과 대립각을 세우기보다 외교적으로 풀자는 입장과 원칙을 지키자는 입장으로 나뉘는 듯 합니다. 저는 원칙주의자입니다. 자주적 입장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또 전국의 학생·청소년들에게도 한마디 전했다.

“인간은 누구나 가치중심적인 생각을 합니다. 비록 어렵더라도 매사에 주관을 뚜렷하게 펼치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이 연속됩니다. 항상 옳은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권성하·송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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