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요하의 작은옹달샘] 처음으로 광주 망월동과 전 전남도청을 가다
    [지요하의 작은옹달샘] 처음으로 광주 망월동과 전 전남도청을 가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 전두환에 대한 분노
    • 지요하 소설가
    • 승인 2019.08.2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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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택시운전사'에도 등장하는 독일인 뮈르겐 힌츠페터의 묘/사진=지요하
    2016년 작고한 독일인 뮈르겐 힌치피터 기자의 묘. 유품과 신체 일부가 안장되어 있다. 그가 등장하는 영화 ‘택시운전사’는 그의 작고 이듬해에 개봉되었다./사진=지요하
    지요하 소설가
    지요하 소설가

    [굿모닝충청 지요하 소설가] 1979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나는 여러 개 화력발전소의 석탄재를 수거 판매하는 작은 회사의 마산화력발전소 담당 직원이었다. 과장이라는 호칭을 달고 있었지만, 실은 굴뚝청소부나 다름없었다.

    석탄 70%에 벙커C유 30%를 섞어 태워서 발전기를 돌리는 마산화전은 계속 막대한 양의 석탄재가 배출되었다. 모래와 자갈이 섞인 바텀애시라는 부산물은 따로 수거하는 업체가 있었고, 미세한 입자들로 이루어진 플라이애시라는 부산물은 압축기에 의해 거대한 탱크에 저장되었다.

    이 탱크 안의 플라이애시를 제때 빼내야 발전기를 돌리는 일이 원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탱크 안의 플라이애시를 빼내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탱크 밑에 트럭을 넣고 적재함에 플라이애시를 빼내는데 물을 계속적으로 적당히 섞어서 빼내야 한다. 자칫 방심하기라도 하면 플라이애시가 사방으로 날아올라서 당장 민원이 발생하고 발전소 측으로부터 질책을 당한다.

    시멘트 입자보다 더 미세한 플라이애시를 시멘트에 섞어서 사용하면 표면이 더욱 미려해져서 윤택이 나고 강도가 더 강해지고 방수 효과도 커서 상품 가치가 있었다. 대구와 광주 등 곳곳의 판매업자와 건축업자들이 수요기 때는 자주 트럭을 가지고 와서 플라이애시를 실어가곤 했다.

    대개는 외상으로 가져가는 식이어서 내가 겨울철 비수요기에는 출장을 다니며 수금도 해야 했다. 비수요기에는 플라이애시를 차에 실어다가 교외의 야적장에 저장을 하는데,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도둑맞는 일도 있었고, 거기에서도 큰 덮개 안의 플라이애시가 바람에 날러 민원이 발생하곤 했다.

    발전소와 우리 회사는 철저히 갑/을 관계였다. 갑의 횡포에 가까운 압력과 플라이애시를 외상으로 가져가는 업자들의 미납금 누적, 플라이애시를 공짜로 얻어가려는 동네 깡패들과의 알력과 충돌 등등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 ,

    그때의 고생스러웠던 경험을 소재로 소설 한 편 쓰리라 그때부터 마음먹었는데, 그 후 40년 가까이 흐르도록 그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세월은 계속 하염없이 흐르고, 나는 늙고 병든 몸이 됐다.

    난생 처음 광주에 가게 된 계기

    망월동 며역 제단에서 분향하는 아내/사진=지요하
    망월동 묘역 입구의 제단에서 아내가 분향을 하고 있는 모습/사진=지요하

    광주에서 사는 박 사장이라는 분의 미납금이 많아서 1980년 5월초 광주로 출장을 갔다. 당시엔 내 차도 없고 운전도 못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박 사장을 만난 다음 무등산 자락으로 가서 닭 요리로 저녁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무등산 여관에서 하룻밤을 잤다. 박 사장에게서 돈은 받지 못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후 5월 중순께부터 박 사장과는 통화도 되지 않았다. 아예: 전화기는 먹통이었다. 당시에는 영문을 몰랐는데, 나중에서야 광주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풍문으로 알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1980년 5월의 광주, 그 참혹한 실상을 명확히 알게 됐을 때 나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광주에서 그 일이 발생하기 직전에 내가 광주를 다녀왔다는 것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다행스러운 마음이었으나 차츰 그 마음은 죄스러움으로 변했다. 광주에서 그 참혹하고도 엄청난 일이 발생하기 직전에 광주를 다녀왔다는 것은,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다행스럽다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미묘한 죄의식과 부채감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박 사정과는 연락도 하지 앉았고, 마산에서의 일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경기도 남양만의 간척공사장으로 가서 2년 동안 살았다.

    광주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

    제3묘역 이한열 열사 묘 앞에서/사진=지요하
    망월동 5.18묘역의 제3묘역 안에 잠들어 있는 이한열 열사의 묘 앞에서 잠시 묵념을 했다. 나는 허리 통증으로 허리춤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사진=지요하

    그 후 나는 광주에 대해 미묘한 향수 같은 것을 지니게 됐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등을 자주 불렀고, 그 노래들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어디에서나 광주 사람이라면, 또 순천이나 목포 사람들도 만나기만 하면 악수부터 하고 애정을 표시하곤 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광주에 가는 일을 미루기만 했다. 단체로 광주에 갈 기회들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일이 꼬여서 포기한 적들도 있었다. 아내와 결혼한 후 맨 먼저 한 약속이 광주에 가는 일이었다. 그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가운데 세월만 갔다.

    그 무심한 세월 동안 광주 시가지를 구경한 적은 두 번 있었다. 2005년 봄 태안성당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제주도를 가는데, 광주비행장까지 운전 봉사를 한 적도 있었고, 2017년 봄 대자 한 사람이 광주가톨릭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돼서 나주에 있는 신학교에 갔다가 광주의 살레시오수도원에 들러 점심 대접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 두 번의 광주 나들이 때도 망월동과 전 전남도청은 들르지 못했다. 시간 여유도 없었지만, 그 두 곳은 꼭 아내와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들르는 차원이 아니라 오로지 또 온전히 순례와 참배 차원이어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고장의 시민단체 ‘참여연대’에서 광주를 가기로 했는데, 그때는 아내가 교직에 있을 때여서 혼자 가기가 이상하게 미안하여 끝내는 포기하고 말았다.

    드디어 아내와의 신혼 초 약속을 노년 들어 실행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일부인 전 전남도청 정문 앞에서/사진=지요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일부인 전 전남도청 앞에서 부부 함께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렸다./사진=지요하

    지난 8월 2일, 딸의 제의로 가족이 힘께 광주에 가게 됐다. 올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면접을 앞든 딸이 앞으로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먼 길 나들이가 쉽지 않을 테니 이때 광주를 다녀오자고 했다. 딸도 광주에 대한 일종의 채무감과 향수, 애정을 갖고 있었다.

    딸이 운전을 했다. 나는 몸이 정상이 아니어서 장거리 운전은 딸이 전담을 한다. 먼저 망월동 5,18묘역을 참배했다. 1묘역과 3묘역을 들러보고 수많은 5.18민주영령들의 비석과 영정들을 보았고, 이한열 열사와 농민 백남기 선생의 묘 앞에서는 묵념과 기도를 했다.

    그런데 나는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신세였다. 3년 동안 병고를 겪다보니 잠이 들지 않아 수면제를 복용해야 했고, 그러다보니 허리와 골반, 다리 근육에 문제가 생겼다. 언덕을 오를 때는 딸이 손을 잡아 끌어주기도 하고, 아내가 내 등을 밀어주기도 했다. 왕성하고 호기롭게 걷던 호시절을 다 보내고 늙마에 걸음마저 불편해진 늙고 병든 몸으로 와서 망월동 묘역을 참해하지니 5.18민주영령들 앞에 면구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더욱 오기진 마음으로 3묘역 초입 길바닥에 누워 있는 ‘전두환’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더욱 세게 자근자근 밟기도 했다. 조국의 민주주의를 무력으로 철저히 파괴하고 정권을 탈취했던 살인마 전두환이 오늘도 호화롭게 살고 있다는 그 불가해한 사실이 다시금 내 가슴을 치는 듯했다. 정말 처참해지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조국의 민주 제단에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친 수많은 민주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전두환은 믿지 않으나 나와 우리 가족은 ‘믿는’ 하느님께 계속 기도를 했다.

    망월동 5.18묘역 참배를 마친 우리 가족은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전남도청이었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찾았다. 여러 개 건물로 연결된 기념관 전체를 천천히 관람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참혹한 실상들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디에서는 절규와 함성이, 또 요란한 총소리가 들리고 피비린내가 풍기는 것도 같았다. 숙연한 마음 가운데서도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실상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기도 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나는 30대 초반이었다. 오랜 세월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속에 늘 합류하며 살아왔다. 아내는 당시 20대 중반에 초등학교 교사로서 정보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1987년 나와 결혼한 덕에 정보 시야가 넓어졌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도 가지게 됐다.

    1987년 11월생인 딸은 부모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을 자연스럽게 주입 받았다. 그리하여 역사의식도 명확해졌다. 지지난해 결혼한 아들과 며느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족은 서로 동지관계였다. ‘아시아문화전당’의 곳곳에 공손한 자세로 서서 안내를 하는 젊은이들도 우리 가족과 동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젊은이들에게 다정한 인사로 감사를 표하곤 했다. 그리고 아시아문화전당을 나와 저녁 무렵 귀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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