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 33] 700년 세월 변함없이 마을을 지켜 온 장포리 회화나무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 33] 700년 세월 변함없이 마을을 지켜 온 장포리 회화나무
  • 장찬우 기자
  • 승인 2019.10.31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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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장찬우 기자, 사진=채원상기자] 충남 서천군 비인면 장포리에 가면 ‘선비나무’라 불리는 회화나무가 있다.

예로부터 회화나무는 ‘출세목’이라 불렸다.

과거에 급제하면 임금께서 하사해 심도록했다고 전해진다.

과거에 얼마나 급제한 사람이 있었는지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이 마을에서 국가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잇따라 나왔다고 한다.

마을 사람 대다수가 장수하고, 꽃이 반쪽만 피어 변란을 예고했다는 전설 때문에 ‘수호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비인면 장포리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시에 따라 장진리·포성리·신동리·기로리 일부를 합해 장진과 포성에서 이름을 따서 장포리가 됐다.

장포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장포1리는 북쪽 선도리와 접하며 장포2리는 장포 포구로 흘러드는 장포천을 경계로 다사리와 접하고 있다.

장포1리 마을에 포성, 또는 포성대, 포성리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는데 옛날에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성터 구실을 해서 생긴 지명이라 한다.

1906년 의병장 민종식의 휘하에서 홍주성 점령에 공을 세운 의병장 문석환(文奭煥 1869. 10. 16 ~ 1925. 8. 30)이 살던 곳이다.

이곳 포성대에 그의 묘가 있었는데 1996년 10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묘비번호 595)에 안장됐다.

천혜의 갯벌을 곁에 둔 장포리 사람들은 배를 부리지 않아도 갯벌에 나가 바지락, 동죽을 채취하고 할미섬에서 굴을 따서 소득을 올렸다.

바지락, 동죽, 백합 등이 지천이었지만 지금은 뻘이 쌓여 들어가기조차 어렵다.

맨손 어업만으로 하루 30~40만원을 벌던 시절에는 30대 젊은 부부들이 많았지만 오늘날 장포리는 70대 이상된 노인 100여 명만이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대부분 농지 너댓마지기인 소농들이다.

자식들은 대부분 나가 사는데 다시 돌아와 살겠다는 사람도 없다.

700년 넘은 세월동안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 온 것은 회화나무 뿐인가 보다.

장포리 회화나무는 2012년 보호수로 지정됐고 높이는 12m, 둘레는 120㎜이다.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는 충남도청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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