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공주 우금티는 교전 아닌 충돌사건"
"1894년 공주 우금티는 교전 아닌 충돌사건"
지수걸 공주대 교수, 동학농민전쟁 학술토론회서 주장…"사망자 1000명 안 넘어"
  • 김갑수 기자
  • 승인 2019.11.03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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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1월 충남 공주 우금티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관군·일본 연합군 간 ‘전투’는 정식 군대와 군대가 맞붙은 교전(交戰)이 아닌, 집회와 시위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충돌사건’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SBS 홈페이지: 드라마 '녹두꽃'의 여주인공 송자인이 우금티 전투 현장에서 오열하고 있다. 오른쪽은 지수걸 교수/ 굿모닝충청=김갑수 기자)
1894년 11월 충남 공주 우금티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관군·일본 연합군 간 ‘전투’는 정식 군대와 군대가 맞붙은 교전(交戰)이 아닌, 집회와 시위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충돌사건’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SBS 홈페이지: 드라마 '녹두꽃'의 여주인공 송자인이 우금티 전투 현장에서 오열하고 있다. 오른쪽은 지수걸 교수/ 굿모닝충청=김갑수 기자)

[굿모닝충청 공주=김갑수 기자] 1894년 11월 충남 공주 우금티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관군·일본 연합군 간 ‘전투’는 정식 군대와 군대가 맞붙은 교전(交戰)이 아닌, 집회와 시위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충돌사건’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한 당시에 발생한 사망자도 1000명을 넘지 않을 거란 견해가 나왔다.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지수걸 교수는 지난 달 25일 공주대 공주학연구원 2층에서 열린 ‘1894년 우금티,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까?’ 학술토론회에서 ‘민회전통의 지속과 변용-1894년 사건 성격 재론’을 주제로 발제하며 이같이 강조했다.

먼저 지 교수는 “본 발제의 핵심적인 주장은 1894년 사건의 성격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농민전쟁’이라는 측면 이외에 집회(民會)와 무장시위(義擧)라는 측면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1894년 사건의 주체는 ‘농민군’이 아니라 ‘동학군’으로 집단정체성을 이해해야 하며, ‘전투’보다는 ‘집회와 (무장)시위’를 더 주목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물론 남접집단이나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1894년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경우 ‘농민전쟁론’이라는 것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국 각지에서 각자 기포한 동학군은 남접집단의 지도하에서 집회와 무장시위 활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지 교수는 또 “척양척왜, 보국안민 등의 구호는 당시의 정세와 조건을 반영한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수단이지, 동학군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며 “1894년 시기 동학군은 ‘백성이 하늘이다’라는 자신들의 믿음, 그리고 민본(民本)과 인의(仁義)를 중시하는 당시의 정치문화를 기반으로 해 당면 과제였던 교조신원과 척양척왜, 보국안민을 요구하고 실천하기 위한 집회와 시위를 주도했을 뿐”이라고 역설했다.

지 교수는 특히 “‘11월 9일 우금티에서 40~50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상당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통설은 관군들이 공을 자랑하기 위해 과장한 기록에 기초한 것”이라며 “백락완의 ‘남정록’이나 당시의 정황자료로 보면 잠깐 사이에 동학군의 기세가 꺾이면서 승부가 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 지 교수는 “일본군이나 관군 측의 기록에 의거해 봐도 공주전투의 사망자는 1000명을 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우금티 인근에 집단매장지가 확인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며 “결사전이기는 하나 동학군 지도부는 결코 무모한 옥쇄론자(玉碎論者)가 아니었고, 동학군도 불나방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다음으로 지 교수는 “개설서나 교과서는 동학군 여당이 이후 의병운동(특히 을미의병)에도 참여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역사 조작이자 왜곡”이라며 “을미의병의 주체들은 대개 동학군을 탄압하는데 앞장선 유생들이었다. 동학군 지도부 가운데 을미의병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지 교수는 “1894년 사건을 민본과 인의를 실천하기 위한 집회와 시위 사건으로 규정한다고 해서 그 역사적 의미가 축소·폄훼되는 것은 아니다”며 “민본과 인의는 척양척왜·보국안민, 반외세·반봉건보다 훨씬 더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가치이자 덕목”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토론자로 나선 계룡중학교 정선원 역사교사는 “민중의 정치적 의사 표현은 집회와 시위일 수 있고, 폭력을 통해 새로운 통치자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라며 “1894년의 고부농민봉기, 황토현전투, 장성전투, 전주성 입성 그리고 공주전투는 전쟁이었고 역성혁명론적 사건이었다”고 반박했다.

정 교사는 그러면서 ‘전봉준공초’ 기록과 관련 “1894년 11월 9일 오전 10시에서 오후 2~3시까지, 40~50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이때 전봉준이 직접 지휘하는 1만 여 명의 농민군이 우금티 공격 뒤에 500명만 남았다고 진술하고 있다”며 “‘이는 희생된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 아니라 상당수가 대오를 이탈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에 동의하면서, 그렇다고 해서 희생자가 적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 2일 현장에서는 ‘2019 우금티 추모예술제’가 개최되기도 했다. (공주시 제공)
지난 2일 현장에서는 ‘2019 우금티 추모예술제’가 개최되기도 했다. (공주시 제공)

이처럼 지 교수의 주장은 통상적으로 알려진 우금티에 대한 통설과 다소 거리감이 있는 것이어서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정부와 역사학계는 물론 11월의 역사인물로 ‘우금티 전투의 동학농민군’을 선정한 공주시 역시 사실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체계적인 연구와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김정섭 공주시장은 그의 책 ‘인물로 본 공주역사이야기’에서 12페이지에 걸쳐 우금티와 동학농민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김 시장은 이 대목을 마무리하며 “동학농민군의 원혼이 떠도는 우금티 옛 싸움터에는 1973년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세워졌다. 그 비문 가운데 ‘삼가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품신하였더니…빛나는 시월유신의 한 돌…5.16 혁명 이래의 신생조국’ 등 일부 구절의 글자들은 으깨져 알아보기 힘든 채 남아 있다”며 복잡한 속내를 덤덤히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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