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집을 시작한 지는 한 50년 됐지. 국수집부터 따지면 60년이 넘어요. 선친께서 시작하시고 제가 물려받고 이제는 우리 아들놈이 맥을 잇고 있으니까, 역사는 역사네. 석교동에서 문창시장으로 옮긴지도… 65년도니까, 벌써 50년 가까이 되는구먼.”
대전 문창시장에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떡집이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흔치 않은 역사를 간직한 집이다. 역사가 긴 만큼 행복함도 커지는 것인가.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며느리가 함께 땀 흘리며 웃음소리가 연신 새어나온다.
10일 새벽 6시. 문창시장 골목을 재촉해 ‘유정 떡 방앗간’을 찾았다. 이 집의 대장격인 김병호(66) 씨와 조영순(60) 씨 부부가 반죽을 기계에 올리며 김이 모락모락 솟는 떡을 뽑아내고 있었다. 둘째 아들 김범주(34) 씨와 며느리 박주희(34) 씨도 방앗간 곳곳을 누비며 일손을 거들었다. 큰 며느리 진미정(33) 씨는 배달을 맡았다. 쌀쌀한 새벽 날씨였지만 이들의 이마엔 금방이라도 굵은 땀방울이 맺힐 것 같았다. 주문이 밀려 정신없이 바쁜 와중이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치 잘 맞춰진 톱니바퀴처럼 각자의 일손을 놀린다.
“아이구, 기자양반 미안합니다. 시간을 맞춰야 해서, 지금 너무 바쁜데... 10시 넘으면 조금 한가해질 것 같아요. 어허, 이거 약속해놓고 미안해요.” “그럼 오전 10시 30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들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할 수 없었다.
잠깐이지만 김 씨 가족이 행복한 모습을 엿본 탓일까. 방앗간 문을 닫고 발길을 돌리며 왠지 오늘 취재에 대한 기대감이 일었다.
다시 약속한 10시 30분. 영순 씨와 둘째 아들 내외가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었다. 큰 며느리 진 씨는 배달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 아버지 김 씨와 방앗간 구석 온돌에 마주앉았다.
“결혼 전부터 선친께 떡 만드는 기술을 배웠지. 지금이야 좋은 기계가 많지만, 그때는 힘들었지. 직장에 다니던 부인도 직장 그만두고 동참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힘이 돼준 사람이지.” 김 씨는 8남매의 맏이다. 선친에게 떡 기술을 배워 집안을 이끌어 왔다.
원래 유정 떡 방앗간은 석교동에서 태동했다. 문창시장에 떡 골목이 생기면서 기계를 도입하고 문창동으로 이전해 50년 가까이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창시장이 생긴 건 얼마 안 돼. 90년도인가 생겼지. 그 전에는 골목에 모인 떡집이 전국적으로 유명했어요. 통근기차에 실어 청주, 천안, 논산 등 가까운 데뿐만 아니라 구미까지도 여기 떡이 팔려나갔으니까. 지금 떡집들이 문창시장의 원조인 셈이지.”
많은 떡집들 중에서도 유정 떡집이 유명세를 타는 건 두 가지다. 첫째는 화목한 3대가 가업을 잇고 있는 역사성이고 또 하나는 최고급 쌀과 잡곡 등을 엄선해 사용해 맛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아들, 며느리랑 함께 일해도 불편한 점은 없어요. 형제간, 고부간 너무 잘 어울리니까, 그리고 일도 알아서 잘들 하니까 얼굴 붉힐 일이 없는 게지. 가훈이나 생활신조? 그런 거 뭐 특별한 게 있나. 그냥 형제들끼리 화목하고 서로 이해하고 사는 거지 뭐...” 김 씨는 가족 간 다소 뜻이 맞지 않아도 맘에 담아두지 말고 서로 이해하며 사는 것이 행복의 최우선이라고 자신의 가족을 예로 들었다.
또 “요즘 가족들끼리 싸우고 이혼하고, 험한 일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워. 모든 것은 욕심 때문이라고 봐. 가족이지만 서로 욕심을 많이 부르면 그게 화를 부르는 것이지. 나는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자식들이 기반을 잡을 때까지는 함께 일하려고 해요. 애들도 욕심 부리지 않고 만족하며 사는 것이 보기 좋아.”라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김 씨는 아들만 셋이다. 아들, 며느리들이 방앗간 일을 도우면서 거의 매일 저녁은 온 가족이 함께 한단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기회가 많아지고 자연스레 화목한 가정으로 부러움을 산다.
큰 며느리 진 씨는 “어머님, 아버님이 열심히 사시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딸이 없으셔서 그런지 저희들을 친 딸처럼 대해주시고, 너무 마음을 편하게 해주셔요.”라며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이들 사이에 고부간의 갈등은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다.
가족들끼리 함께하면서 좋은 점도 많다. 직원을 두고 일할 때는 서로 말 못할 사정이나 불편한 점들이 생겼지만 가업을 잇는 가족들끼리는 스스로의 의지가 뭉쳐 힘든 일이 덜하다는 게 아버지 김 씨의 귀띔이다.
“손주들이 또 한다고 하면 굳이 말리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먼저 권유하지는 않겠지만 하겠다고 달려들면 어쩌겠나. 가업을 잇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김 씨는 아들과 며느리가 지금은 자신보다 일을 더 잘한다며 자손들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마음이 맞고 서로 알아서 일을 하니까 일하는 게 재미있고 쉬워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떡 방앗간을 지켜갈 겁니다. 아이들도 한다면 말리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믿음과 행복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물려줄 생각입니다. 원하는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거, 그게 살아가는 행복 아닐까요.” 김 씨 아들의 마지막 말이 흐뭇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