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택영의 '파리팡세'》 나의 첫 개인전 도록 그리고 이름의 외국어 표기 단상
《정택영의 '파리팡세'》 나의 첫 개인전 도록 그리고 이름의 외국어 표기 단상
  • 정문영 기자
  • 승인 2020.07.06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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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영의 '파리팡세'》 나의 첫 개인전 도록 그리고 이름의 외국어 표기 단상
(My first solo exhibition Pamphlet and Thinking on Naming spell of My Name to Foreign Languages)

정택영 화백의 첫 도록/굿모닝충청 정문영 기자
〈프랑스 파리 거주 화가 정택영 화백의 첫 도록(1986년)/굿모닝충청 정문영 기자〉

내가 업로드한 뉴스피드 아래 페친이신 김지태 선생님이 댓글과 함께 나의 첫 개인전 도록 몇 쪽을 촬영해 덧붙여주셨다.

첫 개인전을 연 때가 1986년이었으니 족히 35년 전의 일이었다. 김 선생님은 군에서 막 전역을 하고 나의 전시를 관람하게 되어 도록을 구하게 되었고, 그 후 자신이 작품생활을 해나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내용도 적어주셨다.

나에게조차도 한 두권밖에 남지 않은 이 귀한 도록을 버리지 않고 소장해오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의 첫 개인전은 태평로에 위치한 서울프레스센터 1층에 위치한 서울미술관에서 열렸다.

그리고 당시 개인전 부제를 〈보는 것과 그리는 것 Seeing and Drawingㅡ "일상에 숨겨진 고통에 부여된 의미 The Meaning onto the Agony Hidden in the Common Life"〉라 붙여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꽤나 철학적인 명제가 아니었나' 하고 헤설픈 웃음을 짓게 된다.

그 당시 도록을 편집하면서 이름을 영문과 한자로 병기해 표기하기로 해, 한글과 함께 영문과 한문을 병행해 썼다.

나의 이름 가운데 자는 '방울 택(鐸)'자로 '종(Bell)'이란 뜻이다. 아마 선친께서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가라'는 뜻으로 지어주신 것으로 성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이 한자는 훈독에서 '택'과 '탁'으로 같이 발음한다고 당시 쓰던 한자 옥편에 나와 있었는데, 동자이음(同字異音)이 많아 국민들에게 혼선을 빚는 한자의 하나였다. 오래 전 서울시장으로 지냈던 양택식 시장이 이와 같은 '택'자이고, 그 외에 연세대 교수 중에도 있었고,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이름에 '택'자를 쓰는 분이 계셨다. 이렇게 동자이음이 많은 한자로 표기함으로써 오는 혼란은 적지 않았다.

그 후, 컴퓨터가 상용화 되면서 모든 주민등록상의 이름이 컴퓨터로 입력되어 저장되었는데, 컴퓨터 프로그램은 이 한자를 아예 '탁'으로 일원화시켰고, 전국의 동음이의 한자로 지어진 사람들의 호칭에 대한 혼란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유년시절 옆집에 사시는 친척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과 명심보감, 소학 등을 익혀 모두 외워냈다. 그때 내 나이 6살 때였는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인 학동 한자개인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네가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한자공부를 반드시 해야 한다면서 나를 그 조부님에게로 이끌어 가셨는데, 당시 할아버지 연세가 91세로 향교 교장을 지내신 꽤 고명하신 분이셨다. 내 생애를 통해 첫 스승을 모시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스승 치고는 가장 연로하신 어른을 모시게 되었다. 그 조부님의 직계손자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들은 밖에 나가 놀기를 즐겨 그 덕망 높으신 조부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한자공부를 외면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수시로 이 어른스승이 즐겨드시는 음식을 장만해 싸들고 오셨다. 나는 종종 바리캉으로 이 스승이 되신 조부님 머리를 깎아드리기도 했고, 쓰메키리('손톱깎이'의 비표준어)를 갖고 가 긴 손발톱을 깎아드렸다. 연로하신 이 조부님 방에 밴 냄새는 그 어떤 냄새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일찌감치 어린 나이에 늙어간다는 것과, 늙으면 어떻게 변해간다는 현상학적 사실을 현장에서 보고 느끼게 되었다.

아마 화가가 된 이후, 철학과 매우 가깝게 지내게 된 계기도 이러한 유년기의 환경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후, 나는 한자에 매우 밝은 학생으로 소문이 널리 났다. 중학교 2학년 때 한자 수업시간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칠판에 '새 조(鳥)'자로 써놓고 글자는 비슷하나 획 하나가 없는 '까마귀 오(烏)'자로 잘못 가르치기에 손을 들고 그 오류를 지적하니, 한자 담당선생님은 "다음 시간부터는 내 한자 시간에 들어오지 말고 도서관에서 책이나 읽으라" 하실 정도였다.

30 초반이 되어 대학 강단에서 강의준비를 할 때, 많은 한자를 아는 힘은 학문 연구에 큰 힘이 되었다.

일찍이 한자를 터득하게 해주신 어머니에 대한 감사는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미술대학 강사 시절, 당시 나에게 강의시간을 자비와 자애를 베풀며 내어준 전임교수들은 강의진행이 비교적 수월한 실기시간을 도맡고 시간강사인 나에게는 미학이나 예술철학, 조형론 등 일주일 내내 매달려 강의 준비를 해야만 하는 어려운 과목을 내맡겼다. 강의시간 전까지 외우다 외우다 못다 외워 준비해간 참고도서와 자료를 주섬주섬 싼 가방은 거의 '똥가방'이라 불리기에 충분했을 정도로 불룩했고 쇠뭉치만큼이나 무거웠다. 학생들은 눈치 챘으리라....왜 저 강사가 저렇게 묵직한 똥가방을 들고 허겁지겁 강의에 달려왔는가를!

맡은 전공과목의 전문분야에서 쓰이는 용어도 한자의 상형을 깨서 파자법으로 풀어보면 금방 그 어려운 용어도 쉽게 해독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요즘 많이 쓰이는 '융합(融合: Convergence)'이란 전문용어의 '융(融)'도 '녹일 융(melting)'인데 이를 파자해 보면 '솥 격(鬲)'자에 '벌레 충(虫)'자가 합해진 그림글자로 '솥에 많은 약재나 재료를 넣고 끓이면 솥뚜껑 사이에서 뿜어나오는 김이 마치 벌레가 기어 올라가는 형상'이란 것을 그림으로 그려 완성한 '융(融)'자인 것이다.

나는 첫 개인전 때 바로 이러한 그림글자를 깨뜨린 파자를 회화적으로 풀어서, 거의 가로 10m 높이 150cm 되는 두루마리식 초대형 작품 몇 점 걸고 나니, 나머지 공간에는 중.소품 몇 점밖에 걸지 못하고 전시를 하게 되었다.

나의 작품 테마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근자에 이르러서는 '빛의 언어(The Language of Light)'란 주제에 천착해 회화로서의 작품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나는 해외전시 때 중국인을 만나면 종이에 한자를 써서 거의 다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공.맹.노.순.묵자 등 제자백가들의 고서들을 많이 접해 어느 정도 동양철학과 현인들의 학문을 익히 이해하게 되었는데, 대학강단에서 서양철학을 기반한 미학이나 예술론을 강의하기 위해 강의 준비를 해보니 동양의 현인들 철학이 서양의 철인들 주장과 거의 일맥상통(一脈相通)함을 깨닫고는 홀로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희열에 넘쳐 무릎을 치곤 했다.

이로써 어느정도 중국문화와 중국인에 대한 이해가 와닿는 경지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어 일찍이 어린시절에 한자를 터득했다는 사실에 저으기 자긍심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여야 하듯, 나 역시 조용하고 겸비한 자세로 살아갈 연륜에 도달했다.

대학 교수 생활도 끝내고 15년 여 전 파리로 이주해 작품활동을 펼쳐나가면서 수많은 외국인들과 중국인 일본인, 대만인들을 접하게 되었고, 나의 인간 교제는 꽤 폭넓은 인맥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파리(Paris)에서의 작품활동에서 많은 것을 느꼈고, 나의 현주소를 알아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 이름을 영어로 표기했던 'Jeong, Taek-Young'이 걸림돌이었고, 외국사람들이 내 이름을 쉽게 읽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간결한 표기로 'Takyoung JUNG'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많은 외국인들이 내 이름을 읽고 발음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확장되어 진출하게 될 때 가장 장애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름 표기란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가령, 독일에서 활동했던 축구선수 차범근 선생의 이름을 'Cha Beom-Keun'이라 표기해서 매스컴에 내보냈더니 다음 날부터 차범근 선생의 성씨가 '범근'이 되어버린 꼴이 되었던 것이다. 성 다음에 콤마를 찍지 않으니 외국인 성명 표기법에서 당연히 앞의 함자가 '이름(Given name)'이고 뒤에 이은 이름이 '성(Surname 또는 family name)'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지금도 차범근 선생은 성이 '미스터 범근'씨로 알려져 있고 이름이 '차'로 알려져 있다. 차제에 앞으로 국제적으로 활동하게 될 우리 후배들은 자신의 이름 영어 표기에 각별히 신경을 써주기를 당부한다.

내가 터득하고 깨달은 동양철학을 한자를 풀어 그린 파자법으로, 한자를 풀어 그림으로 그려 SNS 상에 많은 사람들을 위해 올리곤 해왔다. 이러한 것도 사회교육의 하나가 될 것이고, 이렇듯 좋은 뜻을 품고 반복하다보면 사람들이 나와 교감을 하고 서로 배워나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서 행했던 페북활동의 하나였다.

최근 국제 정세는 자국민우선주의로 급선회 하면서 나 역시 과거에 중국의 학문을 많이 이해하고 삶에 활용해오고 있는 터였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중국인들에 대한 세계인들의 인식은 알려졌다시피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이런저런 일들로 나 역시 그들에 대한 선입견이 썩 명쾌하지는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 근래에 상형을 풀어 그림글자로 플어 SNS상에 업로드해 함께 나누는 동양철학은 주저하게 되어 자제하게 되었다. 세상이 이렇게 마구 급변해 돌아가는데 구태의연하게 그것을 애써 부인할 수는 없었다.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하며 돌고 또 돈다. 옆 사람이 당한 불행이 언젠가 나에게도 돌아와 그 고통을 앓게 되는 일은 다반사였다. 즉, 인생이란 시차가 있을 뿐 삶에서 겪는 고통은 거의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기에 삶에서 자랑할 거리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것을 자랑할 것밖에 그 무엇이 있겠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세상의 변화에 저돌적으로 저항하려들지 않는다. 그것에 순응하며 자신의 가치를 찾고 그것을 발현시키는 것이 값진 인생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했기 때문이다.

정택영 / 프랑스 파리 거주 화가, 전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

www.takyoungj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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