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서울 정문영 기자]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갑작스런 죽음에 그만 말을 잃었다. 그리고는 저녁 내내 마음이 떨리고 손이 떨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는 11일 페이스북을 통해 “지금의 이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며 “그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명복을 빌고 싶지 않다”고 퉁명스럽게 투덜거렸다.
그는 먼저 고인과 처음 만났던 3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제가 박원순 시장을 처음 만난 게 1989년이니,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87년 6월항쟁 이후 시민운동 단체나 부문운동 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기는 상황에서, 역사학계에도 시민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실천적 역사 연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일부가 역사문제연구소를 만들었는데, 저도 석사학위를 받자마자 선배 손에 끌려가 참여했습니다.”
이어 “역사문제연구소는 그 무렵의 다른 학술단체들과는 달리 창립 직후부터 번듯한 2층 건물을 ‘소유’했고, 연구 자료도 상당량을 확보한 상태였다”며 “그 건물과 도서를 기증한 사람은 역사학자도 아닌 박원순 변호사였다”고 회고했다.
“자기 집을 팔아 연구소 건물을 사 줬고, 자기가 모은 책들을 기증했다. 그랬으면서도 연구소의 대표나 이사장 같은 자리는 맡지 않았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에 다니다가 제적된 뒤, 단국대 사학과에 다시 입학했지만 역사학계와는 별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의 역사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말에 동조하여 선뜻 전 재산을 내놓았던 것”이라며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박 변호사도 대단하지만 부인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부인과 동지적 관계가 아니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부일심동체’는 이럴 때 쓰는 게 적확하다.
그는 “처음 봤을 때는 워낙 품이 넓고 스케일이 커서 나이가 꽤 많은 줄 알았다”며 “그 때 나이 고작 30대 중반. 그 나이에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그 말고 과연 누가 있을까? 아마 앞으로도 그 같은 사람이 다시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역사문제연구소가 자리를 잡은 뒤 그는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를 잇달아 만들었고, ‘시민운동의 대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자신은 ‘소셜 디자이너’를 자처했다.”
전 교수가 기억하는 고인은 인간적으로 어떤 사람일까?
“제가 아는 박원순은, 시민운동을 할 때나 시장 일을 할 때나 언제나 행동거지가 정결한 사람이었다. 그는 술도 잘 마시지 않았고, 유머감각도 꽝이었다. 허튼 행동이나 허튼소리를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한숨을 몰아 쉰 다음 “아직 할 일이 많은데, 그가 꾼 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데, 그의 죽음을 어떻게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는 우리 곁에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 육신이 안 보이더라도”라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