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백승호 세종시 학부모]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 즉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전 생애 중에 예측 가능한 사고는 국가가 최저한도의 사회보장책임을 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복지제도의 실현은 정의(justice)라고 할 수 있을까 또 정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그 답을 혹시 한국에서 많이 팔렸던 책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마이클샌델 저)를 통해 얻을 수 있을까?
그러나 책의 마지막까지도 정의는 ‘이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그는 정치철학의 양대산맥인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의 모순성을 설명한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선을 통해 공동체주의 가치를 설명한다.
그렇다면 위의 복지제도를 실현하는 것은 공동체 즉 국가가 되어야 하는데, 공동체인 국가는 의무적으로 국민에 대한 사회복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은 국가에 사회복지를 요구할 수 있는 자연적인 권리가 있는가이다. 로크에 사회계약설에 의하면 국민은 국가에 ,계약을 통해 기본권의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양도하였다.
한편,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곧 정의란 ‘국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의는 공동체의 공동선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공동선은 개인과 개인 즉, 사인(私人) 간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즉 공동체와 개인 즉 국민과 공동선은 존재한다.
세종시교육청이 2020년 2학기부터 초·중·고에 걸친 전면 무상교육 복지를 실현한다고 한다. 무상교육 복지는 공동선인가 라고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시민들에게 물어볼 수 있다. 그 중에는 역차별을 주장하며 평등적 정의와 소수우대정책 등의 퇴보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정치철학에서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그렇다면 각 개인의 경제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 무상교육 복지는 최대다수를 만족시키고 있는가? 그렇다. 아쉽게도 사회적 배려대상자는 소수이고 배려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선천적 재능(경제적 환경)등을 물려받은 그 반대그룹은 다수이다. 결국 공리주의를 만족시키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또 무상교육복지는 공동선인가 하는 것이다. 국가는 공동체의 가치로서 공동선을 추구해야하는데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같은 크기의 파이를 나누어주었다면 그것은 조건 없는 평등이었고 공동선이 된다.
교육정책을 의제하고 설정하는 단계에서 딜레마는 존재하고 소수의견은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은 현재 모든 분야의 정책학적 통계적 사실관계가 뒷받침해주고 있다. 일단 무상교육 복지정책이 시작되었다. 현장에 적용이 되고 평가단계를 통해 정(正)있 있으면 반(反)이 존재하고 이 둘은 공동선을 지향하며 합(合)을 만들고 새로운 정책의제를 만들어 갈 것이다.
세종시에 20~30대 인구비율이 많다는 통계가 있고 세종시가 ‘내 아이를 키우기 좋은 도시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익히 들어왔다. 세종시교육청이 무상교육복지를 전국 어느 시도보다 신경 써 실현해 나가고 있다. 이것이 교육청의 사업예산이 많고 적음을 말해주지 않는다. 즉 여유가 있어서 시작하는 포퓰리즘 정책이 아니다.
무상교육 복지를 실현한 힘의 원천은 ‘교육기회균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교육기본권을 세종시학생들과 교육공동체 모두에게 되찾아 돌려주려는 세종시교육청의 공동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