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인문학 서재] 하느님께 바친 영혼의 자서전
[임영호의 인문학 서재] 하느님께 바친 영혼의 자서전
  • 임영호 동대전농협조합장
  • 승인 2020.08.22 13: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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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고백록

[굿모닝충청 임영호 동대전농협조합장] 가장 위대한 사제이며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1600년 전에 쓴 《고백록》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백(告白)이라고 평가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단에 빠진 문제아에서 개종하여 히포(Hippo)의 주교가 되고, 개종한지 11년이 되던 해인 397년, 《고백록》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3년 뒤 그의 나이 46세에 완성하여 하느님께 바친 영혼의 자서전이다. 

이 책을 길게 쓴 반성문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받았던 사랑을 제대로 돌려 드리지 못한 아우구스티누스가 많은 부분을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에 대한 찬양과 감사에 고백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고백록》은 총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9권까지가 《고백록》의 전부로 자신이 회심할 때까지의 삶을 회상하면서 자신이 실제 겪은 것을 고백한 부분이다. 그 외 10권에서 13권까지는 삶의 가운데 중요하게 대두되었던 구약의 창세기와 같은 여러 주제들을 분석한 내용이다.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그의 어머니 모니카를 떼어 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기독교로 귀의 하기까지 어머니인 성녀 모니카의 헌신적인 기도와 노력이 있었다. 

레몬 크리스티아니가 지은 《아들아, 내 치마폭에는 눈물과 기도가 담겨있다》라는 책은 성녀 모니카의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가슴을 치며 기도했던 안타까운 모습과 아름다운 결실을 그린 일대기이다.

《고백록》의 많은 부분은 그가 인생 초반에 저지른 죄악과 실수를 되돌아보는 내용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회심 이전에는 보통 사람과 같이 결점 많은 인간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당시 로마 총독이 관할하던 햇볕이 강하고 정열적인 아프리카 북부 지금의 알제리 동부 타가스테에서 로마의 하급관리인 아버지 파트리키우스와 기독교인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앙에 무관심하고, 아들이 자기보다 좀 더 출세를 바라는 세속적인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타가스테의 신사임당’으로 불릴 만큼 아들 교육에 열정적이고, 고매하고 자애로운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콘스탄티누스 황제

그가 태어났을 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272~324)가 300년 동안 핍박했던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지 40년이 지났으나 로마제국에서 아직 지배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주류로 자라잡는 국교(國敎)로 선포되기까지는 다시 40년이 지나야 했다.

로마제국은 이미 쇠퇴의 기운이 자라나고 있었다. 정복 전쟁을 멈춘 지 오래로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적었고, 비용 충당을 위하여 가난한 서민들의 세금을 인상하였다.

명예와 헌신을 중히 여겼던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세금 한 푼 내지않고 극성스러운 사치를 했고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고 게르만족과 같은 외국인 용병에게 나라의 안위를 맡겼다. 누가 이런 나라를 사랑하겠는가. 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릴 때 그리스어 공부하기를 싫어했고, 라틴어 공부와 시인들이 지어낸 허황된 말들을 좋아했다. 당시 사람들은 문법에 어긋나는 말을 할 때는 분노하지만, 정작 주님의 계명을 어기고 다른 사람을 증오할 때는 마음조차도 없었다. 

청년기에는 정욕과 혈기가 왕성하여 방종한 삶을 살았다. 고향 타가스테에 가까운 마다우라로 공부하러 갔다가 돌아와 지역 불량배들과 어울렸고, 놀랄 정도로 친구들과 많은 배(梨)를 훔치기까지 했다. 단지 악의보다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하지 말라고 하는 짓만 골라서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371년, 그는 카르타고로 유학을 가서 언어 구사능력을 기르는 수사학 학교를 다니며 웅변술을 배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으면서 철학을 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고와 지혜에 대한 열망에 불타올라 여러 주제에 관하여 더 많은 궁리를 했다. 

열아홉 살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9년 동안은 자기 일생에서 가장 불안정한 시기였다. 성경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평가하고, 참된 진리라고 생각한 마니교에 빠진다. 분별없이 정욕에 어두워 한 여자와 동거하고, 내연녀와의 사이에 ‘신의 선물’이라는 뜻인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낳는다. 

돈을 벌기 위하여 말재주로 사람들을 이기는 기술인 수사학을 가르치고. 점성술에도 심취하여 모든 죄악은 하늘에 의해서 결정된 필연적인 결말로 인간 개인은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다. 

카르타고에서 귀향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들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죽어가면서 기독교 세례를 받은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친구가 없는 깊은 슬픔에 빠져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다시 고향을 떠나 카르타고로 가서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를 방문한 마니교 감독 파우스투스를 만난다. 화려한 언변은 있으나 과연 그것이 진실인지 의심이 갔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서 그에게 실망했다. 

마니교보다 철학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철학 속에 인간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없어 나의 병든 영혼에 대한 치유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383년, 카르타고 보다 로마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것 같고 수업분위기도 더 좋을 것같아 로마로 거처를 옮겼다. 로마의 학생들도 카르타고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많은 학생들은 돈을 사랑하고 정의를 하찮게 여겼다. 수업료를 내지 않기 위해서 공모해서 갑자기 다른 선생으로 가버리는 신의 없는 행동을 하기 일 수였다. 

그때 로마 시장으로부터 밀라노 총독으로부터 고위급 황실 연사로 임명할 수사학 교수 한 분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심사를 거쳐 밀라노로 갔으며 그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멘토인 암부로시우스 그리스도 주교를 만났다. 그는 아버지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주교의 자격으로 밀라노로 온 것을 환영하였다. 

그는 암부로시우스의 설교를 주의 깊게 경청하였다. 처음에는 얼마나 유창하게 말하는가 언변 능력만 관찰했으나 암부로시우스가 성경의 율법 조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영적의 참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듣고 많은 감응을 받았다. 

이는 알레고리(allegory) 적인 성경해석으로, 성경은 다양한 수준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문자적 의미와는 다르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영적 의미와 신비적 의미가 숨어있다고 해석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남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올랐으나 마음은 행복하지 않았다. 황제를 찬양하는 대중연설을 하고 거기서 많은 거짓말을 하고 대중들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박수를 보내는 것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밀라노의 거리를 우연히 거닐다가 술에 잔뜩 취한 거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참된 소망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은 자신이 추구했던 명예나 지위, 돈 같은 헛된 영광이 아니다. 그동안 세속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였으나 이것은 불행의 짐을 끌고 가는 것에 불과했구나.” 

어머니 모니카가 밀라노로 왔다. 그녀는 아들의 신분이 달라진 것을 목격하고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세례를 받아서 신앙을 갖기를 바랐다. 

모니카는 이 계획에 방해가 되는 성욕의 대상인 내연녀인 아데오다투스 엄마를 강제로 아프리카로 보내고 귀족의 딸과 약혼시켰다. 그 약혼녀는 10살로 혼인할 수 있는 나이보다 2살 어려서 그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당시 밀라노의 귀족 자제들은 철학 책을 읽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요한 만남은 플라톤의 계승자인 플로티누스(205~270)의 신 플라톤주의이다. 

신 플라톤주의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이데아의 세계를 주장한 플라톤의 철학을 변형한 논리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동안 하느님을 물질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일원론적인 신 플라톤주의의 글을 읽고서 정신적인 것의 중요성에 눈을 떴고, 진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감각 세계 너머 있는 ‘진리’라는 영원한 정신적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는 유출설(流出說)로 최고의 일자(一者, the One, 만물의 근원)로 부터 만물이 나오는 것을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에 비유한 형이상학설이다. 

인간정신을 초월한 신(神)인 만물의 근원인 ‘일자’에서 유출되여 이어지는 일원론은 마니교의 악신과 선신의 2원론을 극복하는데 주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플로티누스의 신 플라톤주의는 일원론으로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설명할  수 있고, 유출설로 하느님의 창조설을 설명할 수 있으며, 빛의 사상으로  신약성서 말씀의 빛과 연결될 수 있었다.

“존재하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다 선하다. 악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다.”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중요시했다. 지극히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이 이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악이라는 것은 선이 완전히 없어진 것으로 별도 존재하지는 않는다. 창조주 하느님이 만드신 것은 아니다. 모든 완전성은 ‘일자’에 다 들어 있으며 ‘일자’로부터 나온 것들은 일자에 가까울수록 완전성이 높고 멀어질수록 완전성이 덜해진다. 

악은 어떤 대상이 마땅히 지녀야 할 본성 즉 완전성이 결핍된 상태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악이 들어온다. 이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행동의 결과라고 본다. 창세기 아담과 하와는 유혹에 동의하고 악에 빠졌다. 이것이 ‘자유의지’이다.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죄를 저지른 것이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지 않고 내 안에 있지만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죄의 주범이라고 한 마니교와는 확실히 달랐다. 마니교처럼 악신을 절대자로  보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와 완전히 결별하고 아직 의심하고 회의할지라도 그리스도 교회의 예비신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주님의 존재에 대하여 더 큰 확신을 바라지 않게 되었으나 자기 자신이 주님 안에 더 견고하게 서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영적인 아버지였던 심플리키아누스를 찾아가서 로마의 유명한 웅변가이자 철학자였던 빅토리아누스의 회심에 관한 일화를 듣고서 깊은 감명을 받지만, 여전히 정욕과 세상 일이라는 쇠사슬에 매여 있는 자기 모습을 확인한다. 

그는 뒤틀린 의지에서 정욕이 생겨났고, 계속해서 정욕을 좇다 보니 습성이 만들어졌고, 습성을 배척하지 않았더니 필연이 만들어졌다고 고백했다. 

“왜 지금, 바로 이 시각에 저의 추하고 부끄러운 삶을 끝내주시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는 어느 무화과나무 밑에 주저앉아 마음으로부터 통회하며 통곡했다. 그때 옆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노래 부르는 것처럼 반복해서 들려왔다. 

“집어 들고서 읽어라 tolle lege. 집어 들고서 읽어라 tolle lege.” 그는 하느님께서 성경을 펼쳐서 자기 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읽으라고 명하신 것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구절을 읽었다.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회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부로시우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제서야 어머니와 신앙 일치가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방황할 때 어머니 모니카가 꿈을 꾸었다. 

하느님은 주님의 성직자인 어느 주교를 통해 모니카의 기도에 응답을 주셨다. “아들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그런 아들이 멸망을 당할 리 없다. 너 있는 곳에 네 아들도 서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하느님이 준 음성이라고 생각했다. 모니카는 자신의 확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주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언젠가 혼자 책을 읽다가 스스로 자기의 오류에 눈을 떠 하느님에게 등을 돌리고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고 위로했다. 

아우구수티누스는 모든 세속적인 명예를 버리고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가서 수도 공동체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ᆢ

평생의 멘토 어머니 모니카와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로마 근처 오스티아 항구에서 매우 아름다운 영성 체험을 하였고, 어머니 모니카 성녀는 거기서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387년, 그의 나이 쉰 여섯 살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어머니로부터 들은 그녀의 어린 시절과 결혼생활을 회상하고 어머니를 비롯한 하늘의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신자들을 위한 감동적인 기도를 드린 후 독자들에게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부탁했다.

이것으로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끝맺었다. 이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랜 방황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답을 찾기위하여 발버둥쳤다. 

《고백록》에 대한 번역은 수십 가지이다. 이 어려운 내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하여 유튜브에서 가톨릭 대학의 중세철학자 박승찬 교수의 강의를 10번 이상 들었다. 

박 교수의 책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라는 책 마지막 장에 쓴 글에 《고백록》에 대한 끝맺음으로 인용한다. 

임영호 동대전농협조합장
임영호 동대전농협조합장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순히 이론적인 탐구에만 몰두했던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시대에 자신의 소명을 다하려는 지성인이었다. (...)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만남이 모든 근심과 걱정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그도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면서 그 고민을 풀어 보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다. 아우구스티누스야말로 우리 현대인에게 삶의 지혜를 제시할 수 있는 훌륭한 멘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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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y 2020-08-31 03: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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