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눈] 사라진 연령군 태실 비 ‘제자리’ 찾아야
[시민기자 눈] 사라진 연령군 태실 비 ‘제자리’ 찾아야
  • 이기웅
  • 승인 2015.01.19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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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굿모닝충청 이기웅]  충남대학교 도서관 앞 잔디밭에 몇 개의 석조(石造)유물과 비석이 있다. 그런데 그 석조유물과 비석들은 제자리를 떠난 비운의 석조유물이다. 이 중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 고새울의 태봉산에서 반출된 연령군의 태실비가 주목 받지 못한 채 여러 개의 비석군과 함께 방치돼 있다.

"예산에 있던 연령군의 태실비와 석탑
충남대 잔디밭에…
문화재는 원래 있던 자리에 있어야 가치 발해"

제자리를 떠난 지 올해로 꼭 39년이 된 태실 비는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충남대의 소유물이 됐다. 이렇게 보면 숙종대왕이 가장 아꼈던 왕자로 불행하게 20살에 사망한 연령군의 기구한 운명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태실(胎室)은 조선시대 왕실의 자손이 태어나면 태(胎)를 묻고 복을 기원했던 시설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명당의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무병장수해 왕위의 계승에 기여할 것이라는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에 따른 것으로 명당을 선점하고 태실을 만들어서 왕실에 위협적인 인물의 배출을 막으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대개는 대석(臺石)·전석(磚石)·우상석(湡裳石)·개첨석(蓋檐石) 등으로 만들었다. 왕세자의 태실은 석실을 만들고 비석과 금표를 세웠다가 국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을 가봉(加封)했다. 국왕 태실은 8명의 수호군사를(수직사찰守直軍) 두어 관리했으며 태실 주변은 금표로 경작을 금지시키고 접근을 제한했다.

왕자가 국왕으로 즉위하면 관할지역을 승격시키고 예우하며 태실을 태봉으로 격상시키고 주위 석물을 추가로 배치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로 기록을 남겼다.

연령군 이훤(延齡君 李   )은 1699년~1719년 제19대 조선임금 숙종의 서자이며 경종, 영조의 이복동생이다. 은신군이 양자가 되고 남연군 또한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연령군은 흥선대원군의 고조부가 된다. 연령군의 묘는 그가 함께하기를 그토록 원했던 모친 명빈박씨의 묘가 있는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의 가야산자락에 있다.

‘태실 비 전면에는 강희 38년(1699년 숙종 25) 6월 13일 인시생(康熙 三十八年 六月 十三日 寅時生) 왕자아기씨 태실(王子阿只氏 胎室), 후면에는 강희 38년 9월 29일 입(康熙 三十八年 九月 二十九日 立)이라고 쓰여 있다’

마을사람들에게 태실비가 사라진 배경에 대해 들어봤다. 태봉산의 태가 담겨 있던 태와 백자항아리는 일제강점기에 사라졌지만 태실비와 태실의 석조유물들은 마을의 태봉산에 모셔져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60년대 충남대 사람들이 마을회관 앞에 보관 중이던 석조유물을 살펴보고 태봉산에서 옮겨진 연령군의 비가 맞다 하면서 가져갔다는 게 주민들의 얘기다. 석탑의 부재를 사진으로까지 확인해줬다. 
이를 종합해보면 연령군의 태실비와 석등 등 사라진 석물은 60년대(충남대는 1976년기록) 반출되었음이 확실하다.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포의 가야산은 조선 왕실에서 주목하던 명산으로 남연군의 제각인 명덕사가 있었으며 그곳에는 왕실의 왕자들이 휴양하던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가야산 일원에는 1928년 당시까지 왕실에서 관리하던 태실은 5기이며 일제강점기부터 백자항아리와 태를 서삼릉으로 반출하며 모두 훼손되고 말았다. 국권을 상실하며 빚어진 아픈 역사의 상처다.

필자는 가야산과 예산지역에서 사라진 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았으면 한다. 태실 비는 누구의 비인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있는 비석이다. 당연히 모셔진 태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안내판도 없이 세워져 있는 충남대 외진 잔디밭은 태실비가 있어야 할 곳은 아님이 너무나 명백하다.

마을주민들도 태실비가 제자리를 찾아올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역사유적이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당위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문화재는 원래 자리에 있어야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수백 년의 시공을 넘어 문화재로 가치를 인정받고 지역의 공적인 자산이 되려면 그 유물을 빛내는 일뿐이다. 개인집의 정원이나 대학교의 잔디밭이 아닌 유물이 있어야할 제자리를 찾아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떠돌고 있는 우리지역의 향토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아올 수 있도록 예산군과 주민들이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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