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 사진 채원상 기자, 글 윤현주 작가] 탱자나무 노거수(老巨樹)는 흔치 않다.
탱자나무는 크고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가지가 서로 엉키듯 자라난다.
그래서 탱자나무는 여염집, 과수원, 학교 할 것 없이 울타리가 필요한 곳에 심어지고 베어졌다.
필요에 의해 심어지고, 베어지는 게 탱자나무의 운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만날 볼 보호수는 울타리 역할을 했던 탱자나무가 아니다.
충남 부여군 석성면 석성동헌 만큼이나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탱자나무 나이는 어느덧 400살에 가깝다.
탱자나무가 위치한 석성동헌(扶餘 石城東軒)은 조선 시대 지방 관아 건물로 고을의 수령이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 공적일 일을 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인조 6년(1628)에 세워졌으며 1987년 8월 3일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석성동헌의 탱자나무는 동헌 신축 시 군수가 기념으로 심은 나무라고 전해진다.
많고 많은 나무 중 왜 탱자나무를 식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탱자나무가 악귀를 막는다는 설이 있어 주술적 의미를 담았을 수도 있겠다, 짐작할 뿐이다.
탱자나무는 참새들에게 최고의 울타리였다.
굶주린 매가 사냥감을 찾아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해도 탱자나무 속에 숨어 있으면 잡아먹힐 리 없었다.
가시 뻗친 가지는 매가 들어갈 틈을 조금도 주지 않았다.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하면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눈요기도 선사하는 게 탱자나무다.
봄이면 자잘한 하얀 꽃이 나무를 뒤덮고, 가을이면 노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
늦가을 단풍은 또 얼마나 단풍은 얼마나 곱게 드는지......
그러나 탱자나무의 기억이, 그 온도가 누구에게나 같을 수는 없다.
탱자나무의 가장 비극적인 쓰임은 위리안치(圍籬安置)였다.
위리안치는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는 형벌을 말한다.
연산군, 영창대군, 광해군, 추사 김정희도 위리안치를 경험했다.
이들에게 탱자나무는 보호막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탱자나무 꽃도, 노란 열매도, 늦가을 단풍도 고울 리 없었을 것이다.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는 충남도청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