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 94] 느티나무 편지-공주시 우성면 보흥리 느티나무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 94] 느티나무 편지-공주시 우성면 보흥리 느티나무
  • 채원상 기자
  • 승인 2020.11.09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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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사진 채원상 기자, 글 윤현주 작가] 느티나무 그늘에 앉은 아낙들은

일주일에 세 번 집배원이 오는 날을 기다렸다

멀찍이서 자전거가 어렴풋이 보이면

첫사랑을 만난 듯 가슴이 두근댔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석정이네는

집배원이 전해주는 편지를 바로 펼쳐 들었지만

글을 배우지 못한 영주댁은

집배원이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올 때까지

느티나무 그늘에서 서성였다

 

서울로 공부하러 간 큰 아들

부산 신발공장에서 일하는 딸

조선소에 취직한 막둥이

그 아릿한 살붙이들의 소식을 전해 들을 방법은

오로지 편지뿐이었다

 

고단함을 애써 감춘 편지는

집배원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실려

영주댁에게 전해졌다

 

때때로 영주댁은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고,

가끔은 집배원도 함께 울었다

집배원이 먼저 훌쩍이는 날도 여럿 있었다

 

느티나무 그늘이 넓어져 갈수록

영주댁에게 도착하는 편지는 줄었다

하지만 영주댁은 언제나 그랬듯

집배원이 오는 날이면

제일 먼저 느티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영주댁에게 온 편지가 없슈

-괜찮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여

그려. 품 안의 자식잉게 서운해 말어유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모를 느티나무 둥치 구멍에

찬바람이 휘몰아치던 겨울

영주댁 세 살붙이들에 전보가 전해졌다

 

‘모친사망급래’

영주댁의 꽃상여가 마을을 돌던 날

느티나무 둥치 구멍 아래로

뿌리가 삐죽이 생겨났다

 

서운하쥬?

-속이 썩어 문드러져도 나는 괜찮여.

그걸 거름 삼아 내 새끼들이 잘 산다면

나는 어째도 괜찮아

읽을 수 없는 편지를 든 영주댁이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시들어 간다

 

*보흥리 느티나무는 수령 418년, 수고가 8m다. 둥치에 구멍이 나 있고 그 아래 뿌리가 자라났다. 어떤 연유로 나무의 모습이 이렇게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 문득 자식을 품느라 속이 타버린 어머니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는 충남도청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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