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밥 먹기 쉽지 않아요
[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밥 먹기 쉽지 않아요
  • 정덕재 시인
  • 승인 2021.02.13 09:5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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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정덕재 시인]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에는 아침부터 점심 메뉴를 고민한다. 출근하자마자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거나 시원한 음료를 들이켜도 숙취가 달래지지 않는 날들도 많다. 사무실에서 꼼짝달싹하기가 어려울 정도면 모닝커피를 마시러 가는 후배한테 갈증 해소를 위해 음료를 부탁한다.

“시원한 냉커피 한 잔 사다 줘. 아니 아이스 커피.”

“선배님, 아이스 커피는 원래 다 시원해요.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니까요.”

아침부터 한 방 먹고 시작한다. 이렇게 가벼운 잽으로 한두 방 맞기 시작하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가드는 내려가고 어퍼컷을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세상이 사각의 링처럼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잊을 때는 처참하게 무너진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아직 술이 들깨서 그래.”

“그러면 점심에 들깨 칼국수 드실래요?.”

“그거 먹으면 들깬다니까 그러네, 그만 놀리고 너희들 끼리 먹어.”

아침부터 눈치를 보며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긴 숨과 한숨을 연거푸 쉬다가 지난주 세정이를 기다리며 진탕 취했던 날이 떠올랐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진욱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녀석도 마침 해장을 해야 한다기에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고춧가루 듬뿍 넣은 라면을 먹을까 하다가 낯선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동집 간판 아래 유리창에 붙은 포스터가 입맛을 당겼다. 얼큰우동이라는 메뉴에 둘 다 이견을 달지 않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는 여섯 개, 비어있는 자리는 세 개나 됐지만 주방 안 두 사람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십 대 후반이나 삼십 대 초반 가량, 비교적 젊어 보였다. 자리에 앉고 주방 쪽을 여러 차례 봤는데도 주문을 받지 않았다.

“요즘 장사하는 친구들은 문제가 많아. 일단 손님이 왔으면 주문부터 받아야지.”

“그러니까. 물도 안주고. 그냥 나갈까?.”

“가게도 한산한데 우리라도 나가면 좀 그렇잖아. 좀 기다려보자고.”

우리는 투덜거리며 바쁜 주방을 바라보았다. 젊은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에 힘을 주며 장사는 기본이 중요하다는 말을 텔레파시로 보냈다. 1초도 되지 않아 청년이 경쾌한 목소리를 냈다.

“주문은 키오스크로 해주세요. 물은 셀픕니다. 감사합니다.”

매장 입구를 바라보자 젊은 남녀가 키오스크를 누르며 명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키오스크는 무인정보단말기로 터치스크린을 통한 정보전달 시스템을 말한다. 나보다 더 아저씨인 분들을 위한 친절한 설명) 모니터 하단에 카드를 넣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나와 진욱이는 벌떡 일어섰다.

“돋보기를 놓고 와서 ….”

내가 키오스크 다루는 방법이 서툴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자 진욱이가 화면을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동법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듯 열 번가량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에 우리 뒤로 커플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줄을 섰다.

“그냥 우동, 오뎅 우동, 튀김 우동, 얼큰 우동 …” 진욱이가 우동 메뉴를 읽고 별책부록처럼 따라오는 세트 메뉴를 반복적으로 읽은 다음, “돈가스 덮밥, 카레 덮밥, 해물 덮밥…”을 말하는 동안, 젊은 여성 한 명이 줄을 이었고 또 다른 젊은 남성 한 명이 문을 열었다. 설날 귀성열차 표를 구하기 위해 역 창구에 줄을 서는 모습이 연상되자 나는 진욱이의 옆구리를 툭 쳤다.

“먼저 주문 하세요.”

우리는 중년의 통 큰 배려심을 발휘해 뒷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문을 양보했다. 젊은이들은 능수능란했다. 키오스크 작동법 과외라도 받은 솜씨였다. 나는 곁눈질을 하며 주문 방법을 익혔다. 길었던 줄이 사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앞선 손님들이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나는 돋보기가 없어도 주문할 수 있다며 힘차게 키오스크 화면을 눌렀다. 얼큰 우동의 매콤함을 기다리고 있는 뱃속은 요동을 쳤다. 단말기에 카드를 넣으려는 순간 5분 전쯤 눈을 마주친 주방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빈자리가 없는데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주문하는 화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우리는 매장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서 후루룩 쩝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남성 하나가 마주 앉아 있는 여성의 입가를 휴지로 닦아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점심 풍경이었다. 친환경 휴지인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양보의 미덕으로 돌아온 씁쓸함 때문인지, 터치에 익숙하지 못한 손끝 때문이었는지, 속은 더욱 쓰려왔다.

 

수시로 가던 분식집은 주문도 쉽고 계산도 쉬웠다. 주인은 포인트 카드 있냐는 귀찮은 질문도 하지 않았다. 속이 풀어지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카드를 받으며 말을 거는 여유가 생겼다.

“저기 우동집 생겨서 여기가 영향이 있지 않나요?.”

“거기는 주문이 복잡해서….”

“주문이 복잡해요? 복잡하면 여기서 해장라면 먹으면 될 텐데. 잘 먹었습니다. 사장님.”

너스레를 떨고 나오며 근처 커피전문점으로 발을 옮겼다. 얼마 전 받은 모바일 상품권을 쓸 요량이었다. 유명 프랜차이즈답게 주문하는 줄은 길었다. 우동집 보다 두 배는 길었지만 줄어드는 속도는 빨랐다.

주문을 받는 젊은 여직원과 가까워지면서 스마트폰을 검색하는 내 손은 빨라졌다. 한 달 전쯤 카톡으로 보내온 사람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은 당황해서 떨렸는지 빨라서 떨렸는지,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여직원과 마주하는 침묵이 10초가량 지날 즈음, 나는 지갑에 있는 카드를 꺼냈다. ‘포기는 빠를수록 좋은 거지, 무모한 도전보다는 빠른 포기가 모든 사람을 편하게 할 수 있지’. 나는 속으로 교훈적인 말을 되뇌었다. 카드를 받는 여성의 커다란 눈을 외면하지 않았다.

“시원한 아이스 커피 두 잔요.”

“아,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내가 모바일 상품권을 찾지 못해 카드 주문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그 말을 참았고 친절한 한 마디를 선물처럼 던졌다.

“설 명절 잘 쇠세요.”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여직원의 어색한 웃음은 나를 무시하는 표정으로 읽혔다.

 

설 명절 연휴를 앞둔 날이라 그런지 점심 먹고 한두 시간이 지나자 사무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책상 정리를 하는 틈에 젊은 직원 한 명이 다가와 책상 옆에 작은 종이가방 하나를 슬그머니 놓았다.

“술 조금만 드시고 몸 챙기세요. 홍삼이 좋다고 하네요.”

“고마워, 내 몸 생각해줘서.”

나는 선물을 마다하지 않고 냉큼 받았다.

“고맙긴요. 매번 챙겨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이번에도 커피 쿠폰 보내주시고. 그것도 두 장씩이나.”

“연휴 때 여자친구 만나면 같이 마시라고.”

아뿔싸, 엎질러진 물이었다. 두 장씩이나를 강조할 때 이미 눈치 채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저, 여자친구랑 헤어졌는데요. 지난주 술자리에서 말씀드렸잖아요. 그때 저한테 조언도 많이 해주셨는데. 소맥 여러 잔 따라주시면서. 기억 안 나세요?.”

아침부터 날아왔던 잽과 어퍼컷에 겨우 버텼으나 마지막 기습적인 훅 한 방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말씀 인상적이었어요.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고 떠난 사람은 또 반드시 돌아온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이라고 하셨으니 명절 연휴 잘 보내시고 다음 주에 뵐게요”

홍삼 가방을 다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얼굴 무게가 갑자기 몸무게의 절반이라도 된 듯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창피함의 무게는 무한대라는 물리학이 도전해야 할 연구 과제도 떠올랐다. 녀석은 밝은 목소리로 후렴구를 날렸다. 녹다운이었다.

“거자필반이니 반드시 돌아오셔야 해요.”

 

하필 그때 김세정이 떠올랐을까. 37년 만에 만나 2초 가량 얼굴을 보여주고 발걸음을 과감하게 돌린 김세정.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키오스크와 모바일 체크를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거세게 밀려왔다, 세정이가 내일이라도 전화를 하면 어쩌지, 아찔했다. 나는 명절 연휴에 넷플릭스 사이트를 헤매더라도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을 애써 외면할 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동명이인 배우 김세정은 여전히 떨리는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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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시인 약력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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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모 2021-02-15 08:56:08
함께 근무하던 시절에 정 작가님이 그렇게 좋아하는 약주를 단 한번도 실컷 마셔보지 못했던 것이 너무도 아쉽네요ㅠㅠ 지금도 변함없이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지만 말이죠!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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