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재 콩트, 살다 보면…] 앞치마 패션모델
[정덕재 콩트, 살다 보면…] 앞치마 패션모델
  • 정덕재 시인
  • 승인 2021.03.14 16: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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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굿모닝충청 정덕재 시인] 퇴근 시간이 한 시간 안쪽으로 접어들 무렵 같이 일하는 후배가 카톡을 보내왔다. 의자에서 일어나면 보일만 한 자리에서 문자를 보내온 것이나, 퇴근이 가까워지는 시간을 보더라도 내용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저녁에 약속 있으신가요?.”

소주 한 잔 마시자는 뜻이다. 곧바로 답장을 보내면 약속도 없는, 인간관계가 형편없는 선배로 인식이 될까 잠시 뜸을 들인 후 문자를 보냈다.

“일이 좀 있긴 한데….”

“일 없는 거 알아요.”

녀석도 눈치가 무림의 고수 급이다. 6시 정각이 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왔다.

“동태탕요? 족발요?.”

“이번 주에 돼지를 너무 잡아서 좀 미안한데.”

김유신 장군이 타는 말이 사랑하는 여인 천관녀의 집으로 습관적으로 가듯, 우리의 발길도 자연스럽게 양푼이 동태탕 집으로 향했다. 여자 사장은 늘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알하고 고니하고 팍팍 넣어줄게.”

“그거 돈 안 받는거죠.”

“공짜 좋아하니까 머리가 빠지지.”

탈모에 대한 농담을 감수해도 좋을 만큼 사장의 인심은 후했다.

“사장님, 내가 여기 올 때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이 집 양푼은 오래 써서 찌그러졌나요, 아니면 새 양푼을 오래 쓴 것처럼 보이려고 두드려 패나요.”

사장은 식탁 앞으로 다가와 일급비밀이라도 알려주는 듯 귓속말을 했다.

“그 얼굴은 나이가 들어서 주름이 생긴거유, 다리미로 주름을 억지로 만든거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라는 말이다. 외투를 벗고 옷걸이에 걸려있는 앞치마를 꺼내 두르자 후배가 한마디 했다.

“아니, 생전 안 하던 앞치마를 하고 그래요. 좋은 옷도 아닌 것 같은데.”

“오늘 처음 입어서 그래, 사나흘은 더 입어야지.”

“무슨 옷을 나흘씩 입어요. 한두 번 입으면 바로 갈아입어야지. 그러니까 노인네 냄새나는 거예요.”

“뭐, 노인네 냄새가 난다고?”

“지금 난다는 게 아니라 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거죠. 지난번 김밥집 사장도 냄새난다고 안 하던가요?.”

 

동태탕보다 더 좋은 안주는 김 과장과 최 팀장의 승진 소식이었다. 각 1병을 훌쩍 넘길 즈음 일 년에 한두 번 가량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 상혁이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너, 원식이 알지. 걔가 3학년 때 10반였냐? 12반였냐?.”

“뜬금없이 물어보면 그게 생각나냐. 근데 원식이가 누구지, 밴드부 했던 놈인가?.”

“너 잘 대답해야 한다. 이게 지금 상황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거든.”

상혁이는 적당히 취기가 올라 있었고 전화기 건너편은 왁자지껄했다. 동창들 넷이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원식이란 녀석이 몇 반이었는지 화제가 됐다는 것이다. 급기야 늙어가는 수컷들이 술기운을 빌어 전혀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걸며 술값 내기에 돌입한 것이다. 내 답변에 따라 술값의 향방이 달라지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였다.

“원식이 얘기하니까 생각나는데 원식이 사촌인지 하는 선배가 류중일을 3진으로 잡은 사람 아니냐?.”

갑자기 야구감독 류중일을 떠올린 것은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야구부가 전국대회에서 류중일이 속해있는 경북고와 맞붙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야구부는 성적이 거의 바닥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재정 지원이 어려웠는지 팀 창단 이후 1-2년 정도 운영되다 해체됐다. 간혹 고등학교 야구부 얘기를 하면 그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냐며 되묻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존재는 미약했다. 졸업 이후 다시 야구부가 만들어졌는지 소식은 알지 못하지만 1980년대 초반 아주 짧은 야구부의 역사 중에서 류중일의 3진은 동창들 사이에서 단골 화제였다.

“그때 우리 투수가 그 유명한 류중일을 3진으로 한 타석 잡았잖아. 그때 난리 난 거 기억 안 나냐?.”

당시 류중일 선수는 초고교급 선수로 이미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경기는 졌어도 류중일을 3진으로 잡았다는 것 단 하나만으로 엄청난 화제가 된 사건이었다. 선동열과 최동원의 맞대결만큼 한국 야구사에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다.

“그때 그 투수가 원식이 아는 선배였다고?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원식이가 몇 반이었냐니까?.”

전화통화를 하는 도중에 잔을 연거푸 비운 탓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혹시 걔가 승차권 10장을 11장으로 만들던 놈 아니냐?.”

“그건 미술부 현수지. 나중에 현수는 승차권을 직접 그리기도 했잖아. 참 대단한 놈여.”

“현수는 지금 뭐하는데?”

“몇 년 전에 어디 큰 부동산 회사서 그림 그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직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부동산 사무소에서 무슨 그림을 그려?.”

“쪼만한 회사가 아니라 큰 부동산 회사는 지도만 보여주고 땅을 파는 게 아니라, 개발예정지조감도를 멋있게 그려 홍보를 한다던데.”

“아, 그럼 그놈도 부동산 정보로 땅 좀 샀겠네.”

“그건 아닐걸, 맨날 승차권만 위조하느라고 공부를 안 해서 LH같은 델 못 들어갔잖여. 걔가 버스비 아낀 것만 모았어도 차 한 대는 충분히 샀을걸.”

“하기는 그렇지, LH만 들어갔어도 땅 좀 사서 떵떵거렸을 텐데.”

전화통화가 길어질수록 원식이가 몇 반이었는지는 우선순위 밖으로 밀려났다. 그림 그리는 현수에 이어, 태권도부 철웅이가 학교 앞에서 발차기하다 바짓가랑이가 찢어지는 바람에 옆 학교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었다는 얘기로 빠졌다. 전화기 저편으로 원식이가 몇 반 인지만 물어보라는 재촉이 들려왔다. 까르르 웃던 그곳에 김세정도 있었을까.

 

“선배님, 지금도 친구들 만나면 걔 몇 반이었냐, 이런 얘기를 해요?.”

긴 통화에도 불구하고 후배는 통화내용을 재미있게 들은 모양이었다.

“뭐, 술 마시다 보면 이런 저런 얘기 하지. 거울로 담장 너머 여학교 교실에 햇빛 비추던 놈 얘기도 하고, 킥복싱선수 출신이라 호남선을 주름잡았다는 선생 얘기도 하고. 거울로 햇빛 비추던 놈은 2층에서 떨어져 한 달 동안 다리에 석고를 붙이기도 했는데.”

10반과 12반의 숙제를 풀지 못한 채 후배와 나는 소주를 각 2병씩 비웠고 다음 날 해장 메뉴까지 미리 정하고 헤어졌다.

조심스럽게 현관 번호키를 누르고 집에 들어와 외투를 벗었다. 동태탕 냄새 진하게 배인 옷을의류관리기에 넣었다,

“요즘 사정이 어려우신 모양이네.”

뒤통수를 때리는,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잡을 하나 봅니다, 밤에는 소주 회사 판촉 다니시고.”

“그게 뭔 소리여?”

음주 귀가 후 듣는 평소의 잔소리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욕실에 들어가 보셔. 그림 좋을 테니.”

욕실 거울에는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장면이 또렷했다. 술 마시고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실수 중 하나를 명백한 증거로 가져온 것이다. 한 달 전쯤인가, 술집 화장실 열쇠를 집까지 가져와 현관문을 열려고 애쓰던 만취상황에 버금가는 장면이다. 즐겨 마시는 소주 이름과 함께 술병그림이 크게 박혀있는 앞치마는 참으로 수치스러운 패션이었다.

”전국에 있는 소주 회사들이 앞치마 패션쇼 한번 하면 좋겠네. 모델로 딱이네.“

모든 비난과 지적과 굴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앞치마 패션은, 나의 음주사에 또 하나의 기록으로 남겨졌다.

정덕재 시인
정덕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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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시인)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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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경 2021-03-17 10:47:29
ㅍㅎㅎㅎ앞치마를 그대로 ~~~ㅎㅎㅎ그래도 노래방템버린보다는 가정적?인듯요ㅎㅎ
글 초반 후배의 연락에 잠시 뜸들이다 답하는 장면 ㅡ생각하니 넘 구여우심ㅡㅋ작가님 글로 오늘 즐거운 하루가 될거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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