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 유희성 기자] 을사오적 처단 상소문을 올린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을 일으킨지 115년이 지났다.
면암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에 동조한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을사오적'을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면암 선생은 1906년 4월 전북 태인에서 직접 의병을 모아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 년 종묘사직과 삼천 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死生)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투쟁 중 면암 선생은 일제에 붙잡혀 대마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됐다.
“굶어 죽을지언정 왜놈 밥은 먹지 않겠다.”
면암 선생은 단식으로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함께 유배 간 의사들이 울면서 식사하기를 권해 단식은 중단했으나, 고령(74세)으로서 의병활동에 이은 유배와 단식 후유증으로 1906년 11월 순국했다.
포천 출신(1833년)인 면암 선생은 경기도관찰사, 언관 등을 지냈다.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해 관직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일본과의 조약체결을 반대하다가 위리안치(가시 울타리 친 유배지 집에 가둠)되기도 하고, 단발령에는 "목을 자를 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반대해 투옥되기도 했다.
여러 관직을 사직하고 교육활동을 하던 중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해 자문 역할을 했지만, 친일 척결을 주장하다 번번이 일본 헌병에 압송됐다.
의병을 일으키기 전까지 납세 거부,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생활 속 항일운동도 이끌었다.
충남 청양지역 유림들은 1913년 공덕사를 짓고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공덕사는 광복 이후 중수를 거치며 고종황제의 밀지에 나오는 ‘모경숙덕’ 중 두 글자를 따 모덕사(청양 목면 송암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정부는 면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모덕사는 1984년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됐다.
청양군은 지난 13일 면암 최익현 선생의 항일거의 115주년을 맞아 위대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는 추모제를 봉행했다고 14일 밝혔다.
김윤호 부군수는 “나라와 겨레를 구하고자 살신성인하신 면암 선생의 정신은 현 시대 우리들의 진정한 사표(師表)”라고 말했다.
면암 선생을 기리는 경연의 장도 열리고 있다. 청양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는 13~15일 (사)대한민국면암서화협회가 주최한 제10회 대한민국면암서화공모대전 전시회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