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양말이 무슨 죄가 있다고
[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양말이 무슨 죄가 있다고
  • 정덕재 시인
  • 승인 2021.05.0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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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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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정덕재 시인]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책꽂이는 오래된 책에 언제 손길을 주었는지 알 수 없다는 걸 단적으로 증명한다. 작은 책벌레의 서식처가 되어버린 책들은 수년째 그 자리에서 숨이 끊긴 듯 꽂혀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샀던 시집이나 소설책은 이사를 다니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마대자루에 담겨 버려졌고, 살아남은 책들은 고전의 반열이라는 이름 아래 책꽂이를 차지하고 있다.

오랜만에 이가림 시인의 시집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를 꺼낸 것은 유리창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김세정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책 표지를 넘기면 세정이의 볼펜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시인의 대표작이자 시집 제목이기도 한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의 한 구절이 적혀있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모두 14행의 시 가운데 두 행을 차지하는 구절을 보며, 나는 세정이의 마음을 상상하곤 했다.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는, 분명 나를 지칭하는 이름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공원 의자에 앉아 이 시를 함께 읽은 적이 여러 번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감성이 풍부해지는 느낌이야.”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은 어떨까.”

우리는 감상평을 나누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나는 보조개가 예쁜 세정이의 웃음을 보기 위해 썰렁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유리창에 마빡을 대고, 이렇게 쓰면 참 웃길거야.”

세정이는 까르르 웃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도 경망스럽지 않았다. 아마도 가지런한 치아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른 휴지로 책꽂이를 닦으며 세정이의 웃음을 떠올렸다. 이제는 흐릿하다. 해맑은 표정은 빛바랜 사진 너머로 가물가물하다. 이제는 임플란트를 했을지 모를 일이고, 웃을 때마다 팔자 주름이 더 깊게 패여 바라보는 내내 우울증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석 달 전, 어이없게도 4명 이상 식당에 앉을 수 없는 코로나 방역수칙 때문에, 식당 문 앞에서 1초 남짓 보았던 게 큰 아쉬움으로 남았을까. 세정이와 마주 앉아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세정이한테 연락을 하는 게 바람직한지 친구들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윤철이네 식당에서 진욱이를 만났다. 젊은 여자 직원은 아는 체를 했다. 붙임성이 좋은 얼굴은 늘 명랑했다.

“문자를 한번 보내봐.”

윤철이는 적극적이었다.

“지난번 만나기로 한 것도 세정이가 먼저 연락을 해온 거잖아.”

진욱이도 힘을 보탰다.

“이번에는 여럿이 보지 말고 단둘이 만나봐.”

“그래, 그게 좋겠네.”

두 명의 친구들은 나와 세정이의 만남을 부추겼다.

“어디서 만나는 게 좋을까. 여기 고깃집은 아닌 것 같은데.”

고깃집 사장 윤철이에게는 미안했지만 둘이서 어수선하게 고기를 굽는 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맞아, 내가 고깃집을 하고 있지만 여기는 아닌 것 같다. 지난번에 중년의 남녀가 왔었는데 서로 얘기를 하다가 고기를 태우는 바람에 둘이 갑자기 티격태격하는데, 그 꼴도 보기가 안 좋더라고.”

윤철이도 인정했다.

“그럼 어디가 좋을까. 저기 저 여직원한테 물어볼까? 아무래도 젊은 감각이 필요할 것 같은데.”

우리는 일제히 여직원을 바라보았다. 여직원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엄지손가락을 분주하게 놀리고 있었다.

“여자들은요. 일단 냄새나지 않는 데를 좋아해요.”

“아, 그럼 찌개나 전골 하는 식당은 제외를 해야겠네.”

“장어집은 어떤가, 거긴 냄새가 덜 나지 않나?”

“한참 만에 만난 중년의 남녀가 장어집 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장어꼬리가 남자한테 좋다고 하는데 이걸 좀 드셔 보세요. 삼십 년 만에 만난 여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여직원은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또렷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우리는 장어꼬리를 얘기하는 부분에서 동시에 웃었다. 여직원의 말에 수긍한다는 뜻이었다.

“차라리 퓨전 일식집이나 한식집은 어떤가요?”

“그래, 그게 좋겠네. 깔끔한 일식집도 괜찮겠어.”

“근데 문제는 식당이 아니라요. 꼰대같은 아재 스타일을 벗어나야 한다는 거죠?

여직원이 꼰대와 아재라는 말을 내뱉자, 우리는 호기심 가득 찬 눈빛으로 여직원을 쳐다봤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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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신발 좀 벗어보세요.”

여직원은 다짜고짜 윤철이의 신발을 가리켰다. 윤철이가 순순히 신발 한쪽을 벗었다. 발가락양말이 꼼지락거렸다.

”물론 무좀 때문에 고생하는 분들 이해는 하지만요. 30년 만에 만난 첫사랑이고, 아직도 설레는 사랑인데 이런 발가락 양말을 신고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야말로 시작부터 코믹 아닌가요.”

나는 발가락양말을 한 번도 신어 본 적이 없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요즘 종아리까지 길게 올라오는 양말을 신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저씨들인거 아시죠?”

여직원은 내 신발과 양말을 쳐다보며 아저씨 인증의 쐐기를 박았다.

“그럼, 무슨 양말을 신어야 하나?”

“젊은 애들 많이 신는 덧신 있잖아요, 페이크 삭스, 아니면 적어도 복숭아뼈 정도는 드러나야 보기가 좋죠.”

발가락 양말을 신은 윤철이와 장목의 양말을 신은 나와 진욱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직원의 말을 다소곳이 경청했다. 우리는 시험을 코앞에 두고 족집게 과외를 받는 것처럼 진지했다.

“제가 한 말씀 더 드리면요. 이제 날씨가 더워지니까 샌들 신는 아저씨들 많이 늘어날 텐데요. 제발 샌들에 긴 양말 좀 신지 마세요. 그거야 말로 아재들의 대표적인 패션테러라고 할 수 있죠. 당연히 배에 허리띠도 두르지 마시고요. 굳이 허리띠를 하려면 꼭 허리에 맞춰서 하시고요. 우리 사장님이야말로 대표적인 아재 스타일이죠. 양말은 발 관리상 이해를 한다고 해도, 배 바지에 그 셔츠 깃은 왜 세우는 겁니까. 웃겨도 너무 웃겨요.”

윤철이는 여직원의 말에 일언반구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는 스무 번은 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 없는 리액션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동의한다는 마음을 전했다. 윤철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우리 가게는 직원들의 언로가 트여 있어서 참 좋아. 이게 바로 민주주의적인 소통이지”

여직원은 ‘그건 아니죠’ 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청년들 셋이서 문을 열고 들어오자 여직원은 자리를 떴다. 우리는 약속이나 했다는 듯 청년들이 앉은 의자에 시선을 보냈다. 모두 발목이 시원하게 드러나 있었다. 양말을 신었는지 벗었는지 알기가 쉽지 않았다.

손님이 한두 테이블 더 늘어나자 윤철이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진욱이가 술을 따랐고 나도 모르게 한숨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김세정 한 번 만나기가 쉽지 않네.”

“야, 한잔 더 마시고 우리 양말이나 사러 가자.”

“그래, 이제 우리 발목도 해방될 때가 되긴 됐지. 근데 50년 넘게 신은 양말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타박을 받냐. 발목 좀 덮은 게 무슨 큰 죄냐고.”

나는 끝단이 헐거워져 흘러내리는 양말을 끌어 올렸다. 진욱이는 양말을 발바닥 반쯤 가량 벗고 각질을 긁고 있었다. 여직원이 우리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자, 우리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직원이 내뱉은 한숨은 두 테이블 이상 떨어진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들렸고, 뒤꿈치를 긁던 진욱이 손에는 어느새 오이 한 조각이 들려있었다.

“맥주 안주는 오이가 좋더라고.”

정덕재 시인
정덕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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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시인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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