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소스 배합은 어려워
[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소스 배합은 어려워
  • 정덕재 시인
  • 승인 2021.05.09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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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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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정덕재 시인]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7시 전후에 사무실에 도착한다. 나이 오십 초반까지만 해도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에 눈을 떴는데, 요즘은 5시 이전에 잠이 깨는 날들이 많다.

갈수록 출근 시간이 빨라지다 보니 퇴근 무렵이면 무거운 피곤이 몰려온다. 아침형 인간을 유지하려면 야근은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정시 퇴근을 목표로 지낸다 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경우는 자주 있다. 지난 목요일 부득이한 사정으로 야근을 했다. 퇴근 이후의 업무처리는 효율성이 떨어졌고 잡생각이 나는 건 당연했다. 허기가 밀려왔다.

“짜장면 시켜 먹을까?”

“간단한 거 먹으면 어때요?”

젊은 막내 직원 하나가 짜장면에 반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라떼는 말야’ 이렇게 얘기를 시작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짜장보다 간단한 게 어딨어?”

“햄버거나 샌드위치 있잖아요.”

막내 직원은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으로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또렷하게 말했다. 유학파 출신을 증명이나 하듯이 말이다. 단번에 짜장면을 거부한 걸 보면 중국유학은 아닌 것으로 추정했다.

“짜장면을 먹고 후식으로 햄버거를 먹으면 몰라도 달랑 햄버거 하나는 아니지.”

“그럼 햄버거 하나 샌드위치 하나, 두 개를 드시던지요”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동태탕 후배가 햄버거 두 개로 끼어들며 막내 직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햄버거나 샌드위치 드시죠.”

더 이상 꼰대처럼 짜장면을 우기지 말라며, 나름의 중재자 역할을 맡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다리 탈까요?“

점입가경이라는 한자성어가 스쳤다. 예전 같으면 앞에 앉혀놓고 ‘너 점입가경이라는 말을 한자로 써봐’ 이랬을 것이다. 막내 직원은 서슴없이 사다리라는 말을 꺼냈다. ‘우리 때는 말야. 선배가 오천 원짜리 한 장 주면서, 소주 두 병 맥주 세 병에 오징어 한 마리 사 오고, 은하수 두 갑도 잊지 말고. 거스름돈은 잘 챙겨와. 이러면 돈이 부족해도 거스름돈을 갔다 줬는데......’

입안에서 맴돈 ‘라떼는 말야’는 뱉지 않고 그냥 껌처럼 씹었다. 사다리의 운명은 나에게 떨어졌다. 동태탕 후배가 한마디 거들었다.

“거기 복잡해서 주문하기 쉽지 않을텐데 같이 가드려요.”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손짓을 보내고 메뉴를 외우며 사무실을 나왔다.

“빵은 호밀빵, 이탈리아 비엠티. 로스트 치킨, 베지, 치즈는 슈레드 하나 모짜렐라 하나, 채소는 올리브 듬뿍 소스는 렌치 사우스웨스트, 스위트 어니언, 허니 머스터드.”

 

프랜차이즈 샌드위치 가게에 도착할 때까지 직원들이 주문한 메뉴를 여러 번 반복해 외웠다. 처음에는 낯선 이름들도 영어단어 외우듯 중얼거리자 금세 친근하게 입안을 맴돌았다. 그러나 가게 간판이 보이자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시험시간이 되면 뒤죽박죽 엉키거나 생각나지 않는 이치와 같은 맥락이었다.

“로스트 치킨인가, 로티세리 치킨인가, 어떤 샌드위치에 렌치랑 스위트 어니언 소스를 섞어 달라고 했지.”

매장 안에 걸린 메뉴와 앞서 있는 두 명의 손님을 보니 샌드위치 안에 들어가야 할 재료들은 더욱 복잡하게 얽히고 말았다.

“빵은 어떤 걸로 드릴까요?”

“호밀빵으로 주세요.”

“빵은 어떤 걸로 드릴까요?”

여자 종업원의 목소리는 낭랑했으나 귀는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어폰을 많이 써서 소음성 난청에 시달리는 사례가 많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호밀빵으로 주세요”

재차 호밀빵을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자, 허리를 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소년이 손가락으로 내 옆을 가리켰다. <step1 메뉴 및 빵 선택>이라는 희미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개의 빵 종류가 쓰여 있었다. 그제서야 사무실 막내 직원이 주문했던 두께가 얇다는 ‘플랫 브레드’라는 말이 떠올랐다.

“플랫 브레드로 주세요.”

“네 개 다요?”

종업원의 반복적인 질문을 난청으로 여긴 탓일까. 착한 초등학생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일까. 사무실에서 주문한 빵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극도의 불안감이 몰려왔다. 얼마 전 우동가게에서 키오스크 주문에 당황하던 것에 비하면 세 배 이상의 불안과 긴장이 찾아왔다. 누가 어떤 빵을 주문했는지는 물론이고, 치즈 선택과 채소 추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빵을 선택한 이후부터 종업원의 질문보다 앞에 서 있는 청년 손님의 말에 신경을 집중했다. 청년은 종업원이 묻는 말에 1초도 기다리지 않고 신속하고 정확히 답을 했다.

“치즈는 어떻게 할까요?”

“모짜렐라로 주세요.”

“야채는 다 넣을까요?”

“피망하고 양파는 빼 주시고요 피클은 많이 넣어주세요.”

질문과 답은 탁구선수가 공을 반복적으로 주고받는 핑퐁게임으로 보였다. 축구로 말하면 짧은 패스를 빠르게 주고받는 스페인 바르셀로나팀의 티키타카를 연상케 했다. 이것은 마치 내가 중국집에서 종업원이 묻기도 전에 ‘짜장 곱빼기 두 개 짬뽕 보통 하나, 군만두 하나 탕수육 작은 걸로 하나. 진로 이즈백 하나 카스 두 병 주세요“ 전혀 막힘없이 말하는 것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청년의 대답에 귀를 기울일수록 사무실 직원들이 요구한 조합은 기억에서 하나 둘 사라졌다. 마지막 단계인 소스 고르는 코스에 도달했다. 나는 주저없이 말했다.

“스위트 어니언하고 핫칠리 그리고 렌치하고 올리브 오일요”

소스 조합을 끝내자마자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이 울렸다. 종업원이 무언가를 묻는 눈치였지만, 휴대폰 화면에 동태탕 후배 이름이 떠 있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음료는 사무실 냉장고에 있으니까 사 오지 마세요.”

애초에 음료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고 핀잔을 준 뒤 전화를 끊고 카드를 내밀었다. 영수증을 보며 차라리 김밥에 라면이나 짜장면을 먹는 게 훨씬 배부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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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주문을 했지만 별 다른 문제없이 임무를 완수했다는 마음에 불안감 대신 평온함이 찾아왔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더욱 강한 허기가 밀려왔다. 사무실 회의실에 모여있는 후배와 젊은 직원 둘은 내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샌드위치 봉지를 낚아챘다.

“나는 로스트 치킨 시켰는데......”

“내 배지는 어딨어.....”

봉지에서 나온 것은 이탈리아 비엠티 두 개와 로티세리 두 개였다. 처음에 빵 종류 선택을 강요받은 이후,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머지 내가 어떤 메뉴를 샀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게 더 맛있다고 하더라고.”

“누가 그런 말을 해요?”

동태탕 후배가 눈을 크게 뜨고 대들었지만 과장된 표정이 분명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그 집에 간다는 초등학생을 만났는데, 강추하더라고.”

“그럼 지금 초딩 입맛으로 사온거에요?”

젊은 직원 두 명은 주문사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스가 이상한데......”

막내 직원이 한입을 베어 물고 난 뒤 곧바로 접혀있는 샌드위치를 풀어헤쳤다. 나는 소스 선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소스는 괜찮을거야, 스위트 어니언하고 핫 칠리 그리고 렌치하고 올리브 오일이야.”

“이게 그 맛이 아닌데요.”

샌드위치를 꼼꼼하게 살펴보던 막내 직원이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듯, 또다시 원어민 스타일의 발음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

“혹시 여기에 스위트 어니언, 핫 칠리, 렌치, 올리브 오일, 네 개를 한꺼번에 다 넣은 거 아닌가요?”

“아녀, 스위트 어니언하고 핫 칠리, 그리고 렌치하고 올리브 오일 이렇게 따로 말했는데.”

“여기 보세요. 소스 네 개가 다 들어가 있잖아요.”

“정말로 그러네, 샌드위치 하나에 소스 네 개를 다 넣는 사람이 어딨어요.”

평소에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동태탕 후배까지 가세했다. 샌드위치 내용물을 낱낱이 살피던 젊은 직원은 음료수를 따라 마셨다. 입안을 헹궈내는 눈치였다. 나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시간을 뒤로 돌렸다. 종업원에게 소스를 말하고 난 직후 핸드폰이 울린 샌드위치 가게 상황이 떠올랐다. 종업원이 무언가를 물어보는 눈치였으나, 그냥 전화를 받은 게 화근인 것으로 짐작됐다. 갑자기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색다른 맛이네요. 잘 먹겠습니다.”

다른 젊은 직원이 큰 목소리로 맛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입사 3년 차 직원이 할 마땅한 도리로 보였다. 나는 내가 먹은 샌드위치가 어떤 이름을 가진 샌드위치인지 잘 알지도 못한 채 말없이 빵을 먹었다. 자꾸만 속이 얹히는 느낌이 들어 연거푸 콜라를 따랐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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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 야근했던 직원들과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식당과 메뉴 선택은 젊은 직원에게 맡겼다. 스파게티 전문 음식점에 들어갔다. 사이드 메뉴로 피자를 주문했다.

“선배님, 피자 소스는 어떤 걸로 뿌릴까요?”

“여기 있는 파마산 치즈가루, 머스타드. 그리고 핫 소스 다 넣어. 소스는 무조건 있는 거 다 때려 넣는거야. 알았어.”

동태탕 후배는 큰 목소리로 젊은 직원들에게 말했고, 원어민 발음을 구사하는 막내 직원은 ‘예스’라고 대답했다. 차라리 식초와 겨자 두 개의 소스만 있는 냉면집에 갈 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정덕재 시인
정덕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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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시인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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