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등 긁기와 카드 긁기
[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등 긁기와 카드 긁기
  • 정덕재 시인
  • 승인 2021.05.16 16: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굿모닝충청 정덕재 시인] 휴가 나와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더니, 생선회와 소주 그리고 산책이라고 대답했다. 아들은 대학을 2년 다닌 뒤 휴학하고 입대할 때까지 꼬박 2년 동안 놀았다. 낮에는 주로 잠을 잤다. 저녁 어스름에 나가 자정 전후에 들어왔다. 그리고 잠을 잤다. 숨을 쉬고 있는지 침대 머리맡에서 유심히 얼굴을 쳐다본 적도 여러 번이다. 고민이 많아 잠을 자는 거라는 아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퇴근길에 생선회와 소주를 사 가지고 들어갔다.

“술맛 좋지?”

“그럼, 회는 역시 소주지.”

“가끔 부대에서 배달 음식도 먹는다며?”

“치킨 족발 피자 이런 거야, 생물을 먹을 기회는 없지”

녀석은 생물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연거푸 잔을 비웠다.

“아빠, 요즘도 술 많이 마셔?.”

“자주는 아니고 생각날 때 가끔.”

“문제는 그 생각이 자주 난다는 거지. 그러다 큰일 나, 지난번처럼 위장 빵꾸 나봐야 정신 차릴겨.”

계속 말을 이어가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드 줄 테니까 귀대할 때 반납해.”

“사회생활하다 보면 술을 자주 마실 때도 있지. 충분히 이해해.”

카드를 받는 손은 공손했고 말투는 180도 바뀌었다. 군 생활을 안주 삼아 얘기를 나눴다. 녀석은 소주 한 병을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 좀 다녀올게.”

“너무 늦지 않냐?”

“산책은 심야산책이지.”

아들이 입대 전까지 가장 많이 한 게 산책이다. 집 근처 하천길을 따라 2시간 남짓 걷는 게 주요 코스였다. 가끔은 동네 야산에 올라 별을 봤다고 한다. 현관을 나서는 아들에게 행군과 산책의 차이가 뭐냐고 물었다.

“그런 건 포병한테 할 질문은 아니지.”

포병은 3보 이상 탑승이라는, 삼십 년 전 제대했어도 여전히 군대 얘기를 즐기는 어느 꼰대의 말이 스쳤다.

 

다음날, 입대하기 전에 얼굴을 봤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보러 갔다. 1년 만이다. 집안에는 손자를 기다리는 할머니표 돼지갈비 냄새가 진동했다. 녀석은 가방에서 달팽이 크림을 꺼내 내밀었다.

“부대 피엑스에서 샀는데 이거 바르면 주름이 없어진대요.”

“손자 덕분에 할머니 얼굴이 다림질한 것처럼 매끈해지겄네. 동네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거 아녀.”

할머니는 손자를 흐뭇하게 바라보았고 할아버지는 부대생활 전반을 상세히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일과는 어떤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훈련 일정은 어떤지 등을 물었다. 내 아버지인 내 아들의 할아버지는, 1958년 입대해 1961년 제대했다. 60년 세월의 변화가 궁금한 건 당연했을 것이다.

“밥은 잘 나오냐?”

“네”

“우리 때는 나무하러 다니는 게 경장히 대간했는디.”

“나무는 왜요?”

“나무를 해야 취사병들이 불 때서 밥을 하지. 나무하러 나룻배 타고 간 적도 있었는디, 변변한 톱 하나 없이 나무를 했으니 오죽 힘들었겄냐. 그나저나 내무반 잠자리는 편하고?”

“생활관이라고 부르는데 개인 침대라 괜찮아요.”

“얼라, 부대에 침대가 있어? 우리 때는 흙을 무릎까지 쌓고 거기에다 멍석깔고 잤는디.”

“멍석요?”

“멍석이 먼 줄 아냐?”

“콩 타작할 때 바닥에 깔아놓는 거 아닌가요?”“그렇지.”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는 1시간 넘게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녀석은 간간이 지루한 표정을 짓긴 했어도 자세히 대답을 했다. 작별인사를 나누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할아버지가 내민 편지봉투는 성실한 답변에 대한 보상이었다. 물론 봉투 안에 든 것이 편지는 아니었다.

”친구들 만나서 술 한잔 마셔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부대에 복귀하기 전날까지 카드 사용 내역이 수시로 휴대폰 문자로 날아왔다. 치킨집 꼬치집 막창집 삼겹살집, 휴가 마지막 날 밤 편의점에서 쓴 4만 5천 원은 화룡점정이었다.

“내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편의점에서 4만 원 넘게 쓸 일이 뭐가 있냐?”

“피엑스에서 안 파는 담배 한 보루 샀어.”

“양담배 샀냐?”

“글로벌 시대에 양담배 국산담배가 어딨어?. 던힐 말보로 이렇게 이름으로 부르지. 네이밍이 브랜드인 시대에 아저씨처럼 말하지 마시고.”

갑자기 분위기가 역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휴가 나와서 카드를 너무 많이 썼나? 근데 카드 긁을 때마다 예전에 아빠가 수염으로 등 긁어주던 생각이 나더라고. 물론 등 긁히는 것보다는 카드 긁는 게 훨씬 재밌긴 하지만.”

“본인 카드가 아니니까 재밌겠지. 이번 달은 금주해야겠다. 나 대신 아들이 다 마셨으니까.”

“내 월급은 대부분 저축하잖아. 그러니까 내 돈줄은 꽉 막혔지.”

녀석은 카드를 반납하며 일병 월급 40만 원 가운데 30만 원은 저축하고 나머지로 최신영화를 사보는 게 대부분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본인 월급은 저축하니까 내 카드를 쓸 수밖에 없다는 이유가 맞는지 틀리는지 잠시 생각하는 사이, 아들은 한마디를 더 보탰다.

“4564 7289 3562..... 그것 참 신기하네. 아빠 카드 몇 번 썼다고 번호가 막 외워져. 부대에서 영화 사볼 때 결재 할 수도 있으니까 문자 날아와도 보이스 피싱이라고 놀라지 말고.”

 

그날 밤, 나는 이틀 자란 수염으로 아들의 등을 여러 차례 긁었다. 녀석은 카드 사용의 대가로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듯 간지럼 타는 웃음을 지었다. 이제 아들이 등을 내어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정덕재 시인
정덕재 시인

--------------------------------

▲정덕재 시인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등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굿모닝충청(일반주간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0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다 01283
  • 등록일 : 2012-07-01
  • 발행일 : 2012-07-01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창간일 : 2012년 7월 1일
  • 굿모닝충청(인터넷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7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아00326
  • 등록일 : 2019-02-26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굿모닝충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굿모닝충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mcc@goodmorningcc.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