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그녀의 질문은 설레었지만
[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그녀의 질문은 설레었지만
  • 정덕재 시인
  • 승인 2021.07.24 13: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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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정덕재 시인] “BTS의 빠다가 밀려나고 신곡이 올라왔네. 참 대단해. 본인들 곡을 자기들이 밀어내고 또 본인들 노래를 1위로 올리고.”

모닝커피를 마시며 내뱉은 혼잣말이 제법 컸던지, 단발머리 젊은 여직원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아재 꼰대 소리를 듣는 거에요. 빠다가 뭐에요? 버터죠.”

“우리 때는 다 빠다라고 했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다 아미들한테 한소리 들어요.”

곁에 있던 동태탕 후배가 방탄소년단 팬클럽 ‘아미’를 언급하며 지적을 했다. 이미 굳어진 영어 발음을 교정하는 게 쉽지 않다. 지금도 또래들을 만나 가끔 혀를 굴려 미국 본토 발음을 하면 ‘너 빠다 먹었냐?’ 이런 반응이 돌아오기 일쑤다. 그러니 ‘버터’보다는 ‘빠다’가 익숙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가끔은 재미로 흉내를 내기도 한다.

“스무 라잌 버러...”

비교적 정확한 뉴요커 발음으로 방탄소년단의 <butter> 첫 소절을 불렀다. 단발머리와 동태탕 후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갑자기 둘은 혼성중창단이 되어 감탄사를 연발했다. 진심으로 인정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쏘이 누들, 오늘 점심 제가 쏠게요.”

단발머리 여직원이 해맑게 웃으며 화답했다. ‘빠다’를 ‘버러’로 발음한 덕분에 큰 웃음을 주었고 점심 콩국수까지 얻어먹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시원한 콩국수를 먹고 들어오는 길은 햇볕이 따가웠다. 불과 오 분 남짓 걸었는데도 등줄기에는 땀이 흘렀다.

“날이 더워도 보통 더운 게 아니네. 머리가 벗겨지겠어요.”

사무실 건물로 들어오며 머리숱이 많은 동태탕 후배가 머리숱이 적은, 아니 거의 없는 나를 보며 손가락으로 머리숱을 넘겼다. 이럴 때 반응을 하면 하수다. 이미 오래전부터 단련되어 있기 때문에 짐짓 여유있는 대꾸를 했다.

“내가 소싯적에 더운데 많이 다녀서 머리가 벗겨진거야.”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한테 한 말은 아니었는데...”

후배의 말에는 미안함을 담고 있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럴 때는 무시하고 화제를 바꾸는 게 대화에 말려들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오늘 콩국수 집 어땠어?”

“글쎄요. 약간 비린 맛이 나던데요.”

계산한 단발머리 여직원은 자신도 불만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주고도 욕을 먹는다는 얼굴이다.

“콩국수라는 게 면을 적당히 삶는 것도 중요하지만, 콩 삶는 정도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데 2프로가 부족한 느낌이야.”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콩 국물을 사다 집에서 해 먹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던데, 집에서 한번 먹어야 봐야겠어요.”

야근하고 퇴근할 무렵, 동태탕 후배의 말이 떠올라 집 근처 대형마트에 들렀다. 매장 안은 비교적 한적했다. 9시 가까운 시각이라 그런지 두 세 명의 직원들이 매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카운터에는 계산원 한 명 만이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주 가는 가게라서 낯이 익은 직원이다. 매대 위 얼음 더미에 파묻혀 있는 콩물 병뚜껑이 눈에 들어왔다. 20개 한정판매라는 문구는 신선도를 강조했고, 콩물은 단 두 개만 남아있었다.

“원래 한 병에 9천 원인데 떨이로 8천 원에 드릴게요.”

매대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며 계산원이 말을 했다.

“파마하셨네요.”

웃을 때 보조개가 패이는 여자 계산원이 머리를 만졌다.

“한 달 됐는데. 오랜만에 오셨나 봐요?”

“엊그제도 왔는데요, 그때는 왜 못 알아봤지. 수시로 노안이 찾아와서 그런가.”

“젊어 보이시는데 노안이라뇨.”

여유롭게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손님들은 없었다. 내 또래쯤 보이는 여자 계산원은 동네 사람이다. 휴일에 가끔 거리에서 마주치기도 한다. 거리에서 볼 때는 아는 얼굴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곤 했다. 그렇다고 아는 체를 한 적은 없다. ‘저 여자도 나를 알아볼까’ 이런 생각에 선뜻 인사를 건네기는 쉽지 않았다.

콩물이 담긴 병 두 개를 집었다. 하루 종일 얼음 속에 있어서 그런지 손바닥에 차가운 기운이 스며왔다.

“국산 콩인가요?”

“그럼요, 여기 동네 사람이 재배한 콩인데요. 주말에 시원하게 콩국수 해 드시면 좋을거에요.”카드를 받고 계산하는 손놀림은 빨랐다. 장갑을 끼고 있지 않은 손가락은 길었다.

“저기 작은 박스 있으니까 담아가세요. 아니면 쓰레기 봉투 작은 걸로 계산할까요?”

“종량제 봉투에 담아주세요.”

그녀는 콩물이 담긴 병을 5리터짜리 녹색 종량제 봉투에 담았다. 편하게 잡을 수 있도록 봉투 손잡이를 펼쳐주는 친절함을 함께 보여 주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근데 바로 집으로 들어가시나요?”

봉투를 받아들고 두 걸음쯤 옮겼을까, 그녀의 목소리는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었다. 아무도 없었다. 분명 나에게 한 말이었다. 얼굴을 바라보았다. 계산기를 만지고 있는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어있지 않았다. 귀에 바짝 붙어있는 귀걸이는 단아했다.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했을 텐데 표정은 밝았다.

‘원래 표정이 밝은 게 아니라, 나를 봐서 표정이 밝은 건지도 몰라’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런 생각이 스쳤다. 바로 집으로 들어가냐는 질문은 퇴근 후에 만나자는 말로 해석하기에 충분했다.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없었다. 내가 먼저 차를 마시거나, 맥주 한잔을 하자고 작업성 멘트를 날린 것도 아니고,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는 건 그동안 나를 유심히 지켜봤다는 게 분명했다. 답을 하기 전까지 불과 10초 남짓, 머리 회전은 초당 10번은 돌아갔을 것이다. 그녀가 던진 말의 함축적 의미와 표정에 담긴 설렘, 이런 모든 걸 무시하는 것은 숙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내일 주말이라 오늘 저녁은 시간 많아요’ 이렇게 말을 하자니 너무 가벼워 보이고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렇게 말을 하면 매너있는 사람으로 보일까, 잠시 망설이다가 구체적인 답변을 하는 게 장소 결정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네거리에 오래된 경양식집 있죠, 거기서 맥주 한 잔 해도 되고요. 치맥도 좋죠. 아니면 좀 덥긴 하지만 학교 쪽으로 좀 걷다 보면 새로 생긴 호프집도 깔끔하던데.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귀걸이가 잘 어울리는 미인 분께서 결정을 하시죠.”

내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오히려 떨림은 그녀에게 진정성으로 다가갈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에요?”

반문하는 얼굴도 예뻐 보였다. 마음을 담아 쳐다보고 있어도 서로 불편하지 않을 만큼 계산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맥주가 부담된다면 차나 한 잔 하시죠. 아이스크림 가게도 괜찮아요. 아이스크림 주세요 두 개만 주세요. 가수 임병수 노래 아세요? 이 노래 부르면서 주문하면 요즘 애들도 즐거워하더라고요. 요즘 애들은 임병수 모르는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웃었다. 잇몸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는 자제하고 있어도 즐거운 표정은 역력했다.

“아저씨, 제가 곧바로 집에 가시냐고 물어본 건, 혹시 어디 들렀다 가면 콩물이 상할 수 있으니까 아이스팩 넣어 드리려고 했던 거에요.”

아이스팩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뒤돌아섰고 나머지 문장은 귓등을 타고 들어왔다. 나가는 문까지 다섯 걸음에 불과했지만 시간은 길었고 거리는 멀기만 했다. 얼굴은 화끈거렸고 그녀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다음 주 아이스크림 세일 하니까 그때 하나 사주세요.”

임병수의 노래 ‘아이스크림 사랑’이 후렴구처럼 이어졌다. 출입문 손잡이를 잡고 잠시 멈췄다. 결코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주세요 사랑이 담겨있는 두 개만 주세요 사랑을 전해주는 눈을 감아요.”

정덕재 시인
정덕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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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시인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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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h 2021-08-30 15:20:47
실화인가요?ㅋㅋㅋㅋㅋㅋ
제얼굴이빨개지는건왜일까요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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