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 130] 거인을 기억하는 거목, 느티나무...서천군 한산면 호암리 봉서사 느티나무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 130] 거인을 기억하는 거목, 느티나무...서천군 한산면 호암리 봉서사 느티나무
  • 채원상 기자
  • 승인 2021.08.26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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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글 백인환 기자, 사진 채원상 기자] 봉서사 입구의 느티나무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처럼 보이다가도 경내에서 바깥을 바라보면 외부 세계를 차단시키는 장벽처럼 서 있다.

절 안은 안팎의 소리가 느티나무에 막혀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감돈다.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자나 입신양명을 꿈꾸며 공부에 매달리는 자와 같이 절실한 성취가 필요한 사람에게 봉서사는 세속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 같다.

봉서사는 공주 마곡사에 딸린 말사이다.

말 그대로 작고 아담한 절이며 불상 제작 연도와 조선시대 사찰 기록으로 17~18세기부터 서천 건지산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찰은 우리 고장의 인물 석북 신광수, 월남 이상재, 석초 신응식 선생이 머물며 웅지를 키웠던 사찰이다‘라는 안내판 내용도 18세기 이후의 봉서사를 말하고 있다.

석북 신광수(1712~1775)는 조선 후기의 대문장가이다.

강릉에 허균 남매가 있다면 서천이 본관인 석북 4남매도 조선시대의 유명한 문인들로 칭송받았다.

석북은 가난하고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만, 당대의 정치가 채제공(1720~1799)과 명필가인 강세황(1713~1791)과 같은 오피니언 리더와 교류하면서 주옥같은 명작을 남겼던 시인이다.

석북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35살에 치른 한성시, 지금으로 치면 서울에서 주최한 예비 과거 시험에서 제출한 답안지 ‘관산융마(關山戎馬)’가 교방과 홍류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 시를 노래하지 못하는 기생은 일류 대접을 받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었다.

관산융마의 가치는 조선 후기의 사회적 분위기하고 맞닿아 있다.

출세를 위해 반드시 시험으로 평가받던 시대에 실용적인 글쓰기도 아니고 학문에 도움 되는 글도 아닌 과거시험용 ‘공령문(功令文)’에 매달렸던 당시 학문 분위기와 대비되는 문체라는 점이다.

서민의 애환과 설움 등 시대를 대변하면서 백성들의 심금을 울리고 공감을 불러일으킨 새로운 시풍으로 민중의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석북은 중국까지 자신의 명성을 떨쳤고, 200년 뒤 춘원 이보경이란 자는 신광수를 흠모하여 자신의 이름을 ‘이광수’로 개명했을 만큼 시공간을 넘어 최고의 셀럽으로 자리 잡았다.

석초 신응식(1909~1975)은 석북의 후손으로 어릴 때부터 문학의 뜻을 두고 일본 유학을 다녀왔던 인물로 귀국 후 이육사 등과 함께 문단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현대 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었다.

월남 이상재(1850~1927)는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교육자 또는 종교가로서 민족의 빛과 소금이었던 인물이다.

1927년 월남이 전세방에서 병사하자 서울 인구의 반이 통곡하고 추모하는 글을 적은 만장이 서울 하늘을 덮을 정도로 월남은 민족의 지도자였다.

독립운동가 서재필은 “그는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월남의 병사를 안타까워했다.

월남 선생과 비교되는 인물이 이완용이다.

두 사람은 1888년대 주미 공사관부터 귀국 후 개화파 관료로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만들어 고종을 보필하고 만민공동회와 같은 계몽운동도 함께 했던 동료였으나, 1905년 을사늑약부터 다른 길을 걷는다.

이상재는 여전히 청년교육과 사회운동을 실천하면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을 모아 일제와 맞선데 반해 이완용은 나라를 일제에 팔아먹은 매국노가 됐다.

역사는 반복한다고들 한다.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역사를 제대로 배워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래야 세상에 맞설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출세만을 목적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이라도 부조리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석북은 백성들에게 진실을 얘기한 시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찬양한 친일 문학에 석초는 동조하지 않은 시인이었다.

함께 했던 동지가 변절하거나 죽어가도 월남은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기자는 봉서사에서 세 사람이 키운 웅지가 궁금했다.

아마도 불확실한 시대에 태어난 세 사람은 세상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봉서사 앞에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처럼 백성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이정표로 우뚝 설 용기 말이다.

서천군 한산면 호암리 189 봉서사 : 느티나무 2본 256살(2021년 기준)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는 충청남도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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