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 131] 화려한 꽃으로 돌아온 망국의 선비, 목은 이색...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문헌서원 배롱나무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 131] 화려한 꽃으로 돌아온 망국의 선비, 목은 이색...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문헌서원 배롱나무
  • 채원상 기자
  • 승인 2021.08.31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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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글 백인환 기자, 사진 채원상 기자] 배롱나무의 생김새는 독특해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다.

붉은 꽃이 백일동안 핀다고 해서 ‘백일홍(百日紅)’

나무껍질이 매끄러워 원숭이도 나무 타다가 떨어진다고 해서 ‘미끄럼나무’

나무가 간지럼을 탄다고 해서 ‘간지럼나무’

수피가 부드러워 자꾸 만지고 싶어진다고 해서 ‘희롱나무’

배롱나무는 생김새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을 통해 여러 이미지로 투영되어 왔다.

불교의 수행자들은 배롱나무 껍질이 자주 벗겨지는 걸 보면서 세속의 욕망과 번뇌를 씻어내라는 의미로 오래전부터 사찰에 배롱나무를 심었다.

유학자들에게도 배롱나무는 특별했다. 한 여름 내내 붉은 꽃을 피우는 모습에서 정열적인 삶을 동경한 선비들이 배롱나무를 ‘만당화(滿堂花)’라고 불렀고, 서원과 고택에 한 그루 정도는 심을 만큼 인기가 많은 나무였다.

서천의 문헌서원은 배롱나무로 유명하다.

서원이 창건된 16세기 말 이후에 심어졌다고 알려진 배롱나무의 나이는 현재 353살로 추정하고 있다.

15m 높이와 가슴지름(흉고직경)이 60㎝가 넘는 풍채에서 핀 붉은 꽃들은 한 여름의 문헌서원을 붉게 물들이고도 남을 만큼 눈부시다.

문헌서원은 고려말 조선초의 대학자였던 이곡과 이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둘은 부자 관계이면서도 꺼져가는 고려를 개혁을 통해 지키려던 자와 새로운 질서와 체제를 만들려는 자들의 스승이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과 권근이 그렇고, 절개를 지키고 망국의 신하로 남은 정몽주와 길재와 같은 신진사대부들이 이상과 현실, 진리를 실천하는 성리학적 통치 이념을 함께 공부하는 데 한산 이씨 부자의 역할은 매우 컸다.

고려말은 불확실성과 혼돈의 동아시아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다. 중국은 몽골족에서 한족인 명으로 교체되고 있었고, 일본은 남북조 시대로 분할되면서 고려는 고삐 풀린 홍건적과 왜구들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안으로는 원을 등에 업고 세력을 키운 권문세가들이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거나 가난해진 농민을 노비로 삼는 등 패악을 저질러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상실했고, 불교는 왕실과 귀족의 보호로 받으며 나라 곳간을 털어먹을 정도로 망가지면서 더 이상 고려를 지탱하는 이념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국내외 질서가 혼란스럽고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질수록 정치와 토지 개혁의 중요성을 스스로 자각하고 국가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성리학의 이데올로기는 매우 매력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에서 한줄기 등댓불마냥 자신의 이정표를 삼고 갈 수 있도록 배와 선장이 돼 준 것이 바로 성리학과 이곡·이색 부자였다.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간다는 게 간단치 않다.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용기와 역량이 필요했다.

학문이 뛰어나 원나라에서도 관료 생활을 했던 이곡은 스승 이제현과 숙의 끝에 당시 원에게 고려 처녀를 바치는 ‘공녀(貢女)’ 의 폐단을 원황제에게 상소로 올려 금지시킬 정도로 고려 선비의 기개는 크고 넓었다.

아버지 이곡의 발자취를 따라 간 청년 이색은 원나라에서 공부한 후, 공민왕에게 강력한 개혁안을 제안했다. 후에 왕은 개혁을 통해 고려를 바꾸고자 성균관 대사성의 자리에 이색을 임명했고, 목은은 젊은 선비들에게 성리학 이론을 비롯하여 현실 문제와 대안을 자주 토론하면서 정치·윤리·토지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학자와 관료를 양성하는 일에 매진했다.

스스로는 망국의 한과 앞서 간 동지를 그리워하면서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남았지만, 이색이 키운 제자들은 조선 500년 역사를 지탱하고 화려한 문화를 일군 동량이 되었다.

우리는 여말선초의 역사를 극적인 서사로 채운 이성계와 이방원, 또는 정도전과 정몽주를 중심으로 기억하는 버릇이 있다.

여전히 조선 개국 공신과 고려 충신들을 혁명파와 온건파라는 이분법적으로 보려는 경향도 있다.

분명컨대 이곡과 이색도 그들 못지않게 정열적인 삶을 살았고 한 여름의 배롱나무처럼 우리 역사에 화려한 꽃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산10, 산10-1 : 배롱나무 2본 353살(2021년 기준)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는 충청남도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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