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 글 백인환 사진 채원상 기자] 추사의 삶에서 소나무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서예는 외로운 소나무의 한 가지와 같다(서집여고 송일지, 書執如孤 宋一枝)’
추사고택의 기둥에 써 붙인 ‘주련(柱聯)’에는 그림과 서예에 일생을 바친 추사의 의지를 소나무에 비유했다.
생애 후반에 뜻하지 않은 제주 귀양살이에서 완성한 ‘세한도(歲寒圖)’에도 소나무는 추사를 대변한다.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들지 않음을 안다(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知宋柏之後週)’
제주도 유배로 지인과의 인연이 모두 끊긴 추사를 잊지 않고 청나라에서 구입한 서적을 보내준 이상적에게 스승을 잊지 않은 고마움과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자 그린 ‘세한도’의 늙은 소나무는 추사 그 자체였다.
추사는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로서 왕족의 일가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했다. 스물네 살에는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의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가서 당시 중국의 학문과 예술계의 중심인물이었던 옹방강(翁方綱, 1733~1818)에게 조선 제일이라는 ‘경술문장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청년 추사의 삶은 당당하고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제주에 이어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는 추사 생애 후반의 귀양살이는 자신만만하고 모난(?) 추사에서 겸손하고 소탈한 추사로 바뀌었고 기름기가 빠진 담백한 추사체도 유배 생활에서 완성됐다.
추사 묘소 앞의 소나무도 추사처럼 풍파에 적응하면서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소나무에 대한 기록은 유홍준의 전기 ‘추사 김정희(2018)’편에서 자세히 나온다.
“추사 묘소 앞에는 선생의 학문처럼 품이 넓고 선생의 예술처럼 아름다운 다복솔(盤松)이 한 그루 서 있다. 그래서 추사 묘소를 찾는 이들은 누구나 저 다복솔이 선생의 화신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어느 해 눈이 무척 많이 온 날 다복솔 열두 가지 중 아홉이 설해목(雪害木)으로 부러져나가 세 줄기만 남았고, 지금은 오직 두 줄기가 그 옛날을 간신히 지키고 있다”
추사 묘소 앞의 소나무는 원래 수북이 밥을 담아 놓은 듯한 반송 모양이었으나 이후 대설 피해로 줄기가 부러지면서 두 개의 줄기로 남게 된 것이다.
반송은 6~70년대 박정희 정부가 반일과 민족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작한 사적지 ‘정화사업’에 많이 심었던 나무이고 지금은 사적지마다 크고 우람한 풍채를 자랑한다.
30년 전 추사 묘소의 소나무가 다재다능하고 학문과 예술이 일취월장한 청년 추사의 모습이라면, 지금의 모습은 중력에도 버거워 지지대에 의치한 채 살아가는 노송의 모습으로 ‘독야청정’의 기개와 신념을 잃지 않으려는 노인 추사가 연상된다.
추사는 19세기 한류를 뽐내던 인물이고, 당시 한·중·일 학문 교류의 핵심 인물이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익히 아는 세한도는 추사와 더불어 한·중·일의 학문 교류의 아이콘이었다.
곤궁하고 고독한 자신의 처지를 그림과 함께 써 내려간 글을 보고 화답한 청나라 문인들부터, 추사에 빠져 추사 유물을 수집하고 연구했던 후지츠카 치카시 교수와 그의 아들, 후지츠카 교수에게 세한도를 양도받은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과의 인연 등은 한·중·일 학문과 문화 교류의 상징이 되고도 남을 만큼 추사의 위상은 드높았다.
19세기 이후 한국은 서구열강에 철저히 짓밟혔고, 20세기 중반까지도 전쟁과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변방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21세기는 변방에 머물렀던 우리가 지구촌의 문화 강국으로 올라서고 있다.
19세기의 추사, 20세기 백남준, 21세기는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예산의 추사고택은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데 그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산77-5(추사고택) : 소나무 187살(2021년 기준)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는 충청남도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