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오드리 헵번이네요
[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오드리 헵번이네요
  • 정덕재 시인·영상기획자
  • 승인 2022.09.16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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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굿모닝충청 정덕재 시인·영상기획자] 지방 소도시에 사는 은유는 일주일에 이삼일 기차를 타고 출퇴근한다.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는 날은 별다른 저녁 약속이 없거나 부피가 있는 짐을 싣고 올 경우이다. 나머지 날들은 대개 술자리가 있는 날이다.

일찍 깬 아침에는 6시 22분 첫 기차 무궁화호를 탄다. 간밤의 술기운이 남아 게으름 피우는 날에는 조금 늦은 7시 8분 KTX를 이용한다. 계룡역에서 서대전역까지 무궁화호는 2600원, KTX는 8400원이다. 운행시간은 둘 다 똑같은 14분으로 가성비는 단연 무궁화호이다.

이 구간은 기존의 호남선 철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고속화 철로가 아니다. 아무리 빠른 KTX도 고속으로 달릴 수 없다. 은유는 고속철도가 고속으로 달리지 못하는 것 자체가 희비극이 교차하는 콩트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정기적으로 같은 시간대 기차를 타면 지나온 역에서 탄 낯익은 승객들을 볼 수 있다. 은유가 무궁화호를 탈 때는 좌석이 있어도 공간이 여유로운 자유석 칸에 주로 앉는다. 앞뒤 의자 간격이 좁은 일반 칸보다 지하철처럼 길게 의자가 놓인 자유석 칸이 답답하지 않아서이다.

첫 기차 자유석에 앉아 있는 이들은 10명 남짓해 한산하다.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인은 창문 아래 부착된 봉을 잡고 항상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의자에 앉아 다리 올리기를 한다. 기차 안에서 터득한 운동습관으로 보였다.

“나이 들어서는 근육이 먼저여, 근육이 연금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은유가 물끄러미 바라보면 노인은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내 친구들 중에 나처럼 팔 굽혀 펴기 많이 하는 놈들 별로 없어.”

“관리를 열심히 하시니 건강해 보이시네요.”

“나오는 순서는 있어도 관에 들어가는 순서는 없다고 하잖아. 늙어서는 근육이 젤로 중요해. 특히 하체가 부실하면 쓰러져.”

은유는 노인의 권유로 여러 번 팔 굽혀 펴기와 다리 올리기를 따라 해 보기도 했다. 이삼 분 도 벅찼다. 이럴 때는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는 게 잔소리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오십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 한 분은 10리터 종량제 봉투를 의자에 펼쳐놓고 채소 다듬기를 자주 한다. 얼마 전에는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고구마순 무쳐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요즘 사람들은 고구마 순을 우습게 알어.”

“요즘이 고구마순 맛있는 철이죠.”

“제철에 나오는 거 많이 먹어야 건강해요.”

봉을 잡고 팔 굽혀 펴기를 하는 노인이나 고구마순을 벗기는 중년의 여성이나 대화의 최종도착지는 주로 건강과 관련된 것들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은유는 기차 타기 5분 전에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긴 플랫폼에서 서성이다 보면 오랫동안 봐 온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스트레칭을 하는 이는 늘 스트레칭을 하고, 신문 보는 이는 늘 신문을 보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늘 이어폰을 꽂고 있다.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이십 대 후반 혹은 삼십 대 초반의 여성은 계단에서 내려온 뒤 플랫폼 끝까지 걸어갔다 온다. 단발머리가 기차를 기다리는 방식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플랫폼 끝에서 뒤돌아서면 멀리 기차가 미끄러져 들어온다는 신호이다.

은유가 역에서 단발머리를 처음 본 것은 3년 전이다.

단발머리가 기차역 앞에 도착하는 시간은 6시 55분 전후, 5분 정도는 길가에 선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있다. 운전석에는 젊은 남자가 있다. 남자친구이거나 신혼부부로 짐작했다. 아이가 있다면 아침 7시가 되지도 않은 시간에 매일같이 여자를 데려다주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은유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단발머리가 탄 차량을 수시로 목격했다. 번호판이 외워진 건 자연스러웠다. 지난달 자동차 보험 갱신과 관련해 보험사 직원과 통화를 하는 중에 무심코 자신의 차가 아닌 단발머리가 탄 차량번호를 대는 바람에 은유 자신도 놀란 적이 있었다.

 

은유는 청바지를 사면 다리 길이에 맞게 줄여 입는데 단발머리는 항상 밑단을 접어 입는다. 무릎쯤 내려오는 치마는 단정하다. 일주일에 절반은 바지 나머지 날들은 치마를 입는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핸드백 하나 멘 단발머리의 하이힐 소리가 플랫폼을 울려 귀를 세운 것도 여러 날이었다.

은유는 그동안 한 번도 단발머리와 말을 나눈 적이 없다. 9월 첫날 아침, KTX보다 가을이 먼저 도착해 있던 날이었다. 플랫폼에 제습기를 돌려놓은 듯 바람에 습기가 빠져있었다. 청바지를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맑은 구두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은유의 눈이 점점 커졌다.

늘 보던 단발머리가 아니라 파마머리였다. 머리카락 끝단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말려 올라간 눈에 띌 정도의 변신은 처음이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모습을 보며 은유가 떠올린 건 한 편의 영화였다. 목에 스카프만 했다면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데이트를 하는 오드리 헵번의 파마머리를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파마머리가 계단에서 내려와 은유 앞을 지날 때 난데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봐도 은유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파마하셨네요. 오드리 헵번이네요.”

은유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깜짝 놀랐다. 속으로만 생각한 마음이 목소리로 쉽게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파마머리가 발걸음을 주춤했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얼굴에 단풍이 드는 데 몇 초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만추의 얼굴이 됐다.

1984년에 태어난 스칼렛 요한슨도 아니고, 90년생 제니퍼 로렌스도 아니고 50년대 영화에 나온 1929년생 오드리 헵번이라니, 파마머리의 머릿속에는 적절하지 않은 비유에 대한 합당한 지적이 필요했다. 오래된 유행을 구태의연하게 재현한 것으로 파악한 유행 무식자에 대한 경고도 필요했다.

파마머리가 고개를 확 돌리자 머릿결이 흩어지면서 장미향이 풍겼다. 후각이 발달한 사람이라면 맥주효모가 들어 있는 인기 브랜드의 샴푸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은유와 파마머리가 정면에서 눈을 마주친 시간은 매우 짧았다. 눈을 세 번 깜박일 정도였다.

 

“맨날 똑같은 청바지만 입고 다니나 봐요? 봄 여름 가을 겨울.”

파마머리의 한마디에 은유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영화배우를 비교 대상으로 삼은 어설픈 발언을 반성할 틈이 없었다. 유행 무식자의 부끄러움 역시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오랫동안 파마머리가 은유를 지켜봤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똑같은 바지가 여러 벌이거든요.”

이런 궁색한 변명을 하기에 적절치 않은 상황이었다. 목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은유의 심장 박동이 고속철도가 속도를 높이는 것처럼 빨라졌다. 커지는 박동 소리는 강철의 마찰음을 내는 바퀴 소리에 묻혀 파마머리에 들키지 않았다.

기차가 플랫폼에 멈췄다. 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차에 황급히 올랐다. 파마머리가 기차를 탔는지 확인하지도 못했다. 자리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을 바라봤다. 마치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으로 기차가 달리는 듯했다. 바람에 부딪히는 벼 이삭은 정겨웠다. 오드리 헵번이 두계천 아래 논둑을 거닐어도 잘 어울릴 만한 가을날의 아침이었다.

정덕재 시인·영상기획자
정덕재 시인·영상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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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시인·영상기획자)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치약을 마중나온 칫솔’, 청소년시집 ‘나는 고딩아빠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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